ACTIVITIES

 

 

 

 

 

번호

내용 및 제목

발표 매체 및 년도

설명

50

건축공간과 성차별

디자인문화비평, 2000년 여름

나는 학자도 아니고 이런 주제로 글을 쓸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원고 청탁을 거절하였는데 주간인 김민수 교수가 오히려 현실에서 부딪히는 사람이라 청탁한다고 하여 글을 쓰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공부도 많이 되었고 이 글을 쓰면서 내 생각도 훨씬 발전될 수 있었다.

49

빛의 민주화

우리교육, 0007

우리교육은 전교조에서 만드는 잡지인데 여기서 학교 건축에 대한 특집을 진행하고 있었다. 내가 참여한 주지는 '빛'이었다. 잠실의 한 고등학교를 찾아가 교사들과 대담하는 형식이었다.

48

홍대용

음악춘추, 0005

음악잡지에는 처음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음악과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실학자 홍대용의 삶과 음악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였다.

47

건축의 시간성과 물료

부산 동명정보대학 강연, 2000년 4월 20일

김헌 선생의 소개로 강연 시리즈의 첫 회를 하게 되었다. 이 내용은 공간지에 소개되었다.

46

건축가의 일+터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스튜디오, 2000년 봄

서울건축학교를 잠시 쉬고 경기대 겸임교수로 스튜디오를 가르쳤다. 작업의 수단과 내용이 모두 변하고 있는 요즘에 있어 건축가들이 겪는 문제는 근본적인 것이다.

45

제복의 기억

'건축가의 패션' 전시회, 2000년 2월

POAR에서 주최한 전시회로 건축가들이 옷을 디자인하는 참신한 발상이었다. 나는 '제복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가지고 작업하였다.

44

2000년에 바란다

공간, 0001

새천년을 맞아 한국 건축가 100명을 대상으로 2000년의 바램을 물은 것이다.

43

Pro-File

POAR, 9912

Pro-File은 건축가의 관심사를 6페이지 정도의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기획이다.

42

21세기 한국건축

SBS 텔레비젼, 1999년 12월

세기말을 맞아 각 방송사들은 전례없이 건축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그 관심은 역시 곧 식었다.

41

Synergy 산업으로서의 건축

성신여대 경영학과 강연, 1999년 11월

내 자신 건축을 산업으로 이해하려 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막상 이 강연을 준비하면서 그런 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 신문사에 글 쓰고 여기저기 강연했던 것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40

Memory & Desire: 건축가 김영섭과의 대담

공간, 9911

김영섭이 설계한 청양성당과 당시 출판된 작품집을 통해 그의 건축관을 들여다 보았다.

39

봉두완의 SBS 전망대

SBS 라디오, 1999년 10월-2000년 4월

KBS 일을 마치자마자 이 일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방송국에 갈 필요없이 새벽에 전화로 약 10분간 대담하는 것이었는데, 생방송이라 다소 긴장되었다. 봉두완 선생과도 호흡이 잘 맞아 약 6개월간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

38

나의 작업

부산 동서대학교 강연, 1999년 10월

이 강연부터 나는 김태수 선생의 작품이 아닌 내 작업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독립하려던 생각이 굳어지는 시기였다.

37

안녕하세요, 서울입니다.

KBS 라디오 해외방송, 1999월 9월-10월

약 2달간에 걸쳐 이 프로를 진행하면서 나는 도시와 건축에 대해 어떻게 일상적인 언어로 대중과 의사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 프로는 단파로 송신되어 국내에선 청취가 어려웠다.

36

우리의 도시적 전통

전통과 현대,1999년 가을

전통과 현대는 연세대학교의 함재봉 교수가 펴내는 계간지이다. (그는 투 웨이밍 등과 의견을 공유하는 소위 '신유학'의 신봉자이다.) 이런 잡지들에 기고하면서 나는 점차로 건축계를 벗어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35

공포의 도시

서울건축학교 가을 스튜디오, 1999년 가을

'전쟁과 건축'이라는 나의 지속적인 관심의 범위 내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다시 들여다보려 했던 시도였다. 이 스튜디오는 Archforum에 라이브 중계되었다.

34

인문학적 가치의 위기와 건축

미래의 얼굴 9907-08

미래의 얼굴은 LG 그룹이 출판하는 젊은이 대상의 무가지이다. 편집 대행사인 안 그래픽스에서 사전 협의없이 글의 내용을 심하게 변경, 서면을 통해 이에 항의했던 기억이 난다.

33

현대의 신화

서울건축학교 여름 워크숍, 1999년 여름, 무주

작년에 이어 2번째 학생들과 1주일을 보냈다. 최문규 선생과 2인3각을 했으며, 설계를 했다기 보다는 이야기 거리들을 만들어보려 했다.

32

건축가이기 이전에 시민이다

플러스 9905

건축계의 부패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던 때였다. '한국건축의 지금, 이것이 우선이다'라는 특집 주제를 놓고 쓴 글이다.

31

엘란 구입기, 시승기클럽 엘란 해외 소개

하이텔 클럽엘란, 1999년 5월

여기 소개하기 다소 쑥스럽지만, 나의 삶에 있어 유일한 사치는 영국의 로터스가 개발하고 기아가 생산라인을 인수한 스포츠카 엘란이다. 나는 이 차를 통해서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 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현재 하이텔 클럽 엘란 회원이며, 해외에 있는 로터스 엘란 동호인들에게 우리를 소개하기 위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30

나의 작업

진주 경상대학교 강연, 1999년 3월

고성룡 교수의 초청으로 폭우를 뜷고 진주로 내려갔다. 학교측의 준비가 너무나 철저하여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날 진주성 일대를 돌아본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29

새천년의 건축

문화일보,

김진애 박사를 주축으로 6명의 건축가,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문화일보에 기고하였다. 그러나 건축의 해를 기념하는 다른 행사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도중하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당시 준비한 내용들은 건축과 도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8

서평: '건축은 중요한가?'

이상건축 9902

김진애 박사의 책에 대한 서평을 쓴 것이다. 이것을 쓰고 오히려 저자로부터 서평에 대한 공격적인 평을 들었다.

27

귀덕마을 종교시설

서울건축학교 여름 워크숍, 1998년 여름, 제주

난생 처음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보람은 있었으나 선생으로서의 내 자질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를 느꼈던 1주일이었다.

26

젊은 건축가 7분과 함께

Archforum 토크쇼

젊은 건축가 7인이 한달간 온라인 토크쇼를 하였다.

25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요?

상명대학교 예술대학원 강연, 1998년 4월

건축사와 음악사를 비교하며 동일한 예술적 관심이 분야에 따라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이야기하였다. 특히 피아노와 자동차를 미학적 관점에서 비교했던 기억이 난다.

24

법정내부의 건축설계에 대한 의견

법률신문, 1998년 3월 9일

법원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법정 내부를 보고 건축가로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쓴 글이다.이 글이 나가고 난 후 변호사사무소 사무장으로 일하는 고등학교 동창이 16년 만에 전화를 했다.

23

과천시에 보내는 공개서한

1998년 2월 18일

내가 살고 있는 과천시에서 아파트 도색을 '환경친화적으로', 동물, 수목 등 테마를 사용하여 다시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과천신문에 항의조로 보낸 글이다. 신문에 나지도 않았고, 아파트 도색 계획은 당분간 잠잠한 듯 싶다. 그러나 우리 아파트 벽에 곰이나 사자가 그려지면 나는 미련없이 이 동네를 떠날 생각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22

이것은 경제문제가 아니다

1998년 2월 7일

나라가 경제위기에 빠져있던 때, 답답한 마음을 글로 적은 것이다.

21

건축가도 때로 부시고 싶다

1997년 겨울

이것은 언젠가는 제대로 된 글로 발표가 될 것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을 적은 글이다.이 글의 제목은 지나치게 시류에 편승한 감이 있어 바꾸려고 한다.

20

전쟁과 건축

서울건축학교 강연, 1997년 10월

우리 아버지와 우리 형, 그리고 나까지 해서 우리집 남자 3명의 공통적인 취미는 전쟁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다. (우리는 제국주의 시절의 영국 같은데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나나 형도 집에 있는 책의 상당수가 전쟁이나 군인에 대한 것들이다. 그러다가 나는 이 집안의 관심사가 나의 직업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공개적인 강연을 통해 이야기할 기회까지 갖게 되었다. 이 강연이 계기가 되어 이후 나는 서울건축학교의 튜터가 되었다.

19

건축가, 그리고 그 이후

이상건축 9708

이것은 건축가 조성룡 선생이 용인 호암 미술관에 새로 설계한 찻집과 매표소 및 기념품 판매소 건물에 대한 비평의 성격을 가진 글이다. 나는 선생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또 건축계의 선배로서 존경하지만, 이 글을 쓸 때는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철저하게 비평적으로 썼다. 선생도 이것을 아시고 나중에 다른 분을 통해 말을 전하시기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 해주어 고맙다'고 하셨다 한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역시 같은 건축가로서 서로 비평을 쓰고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인 것 같아 앞으로 이런 일은 삼가하기로 했다. 지금도 비오는 날이면 여기에 가보고 싶다.

18

김 태수 건축의 항성: 금호 미술관과 국민생명 연수원을 중심으로

'항성' 전시회, 1997년 여름

현실비평연구소가 주최한 이 전시회는 별로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 글도 그나마 당시 전시회 기획자에 의해 완전히 기형이 되어 발표되고 말았다. 글의 흐름이 완전히 끊어져서 내가 쓰고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7

서울의 도시환경

Yale Club of Korea 세미나, 1997년 봄

귀국한지 반년 정도가 지나자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갔다. 마침 이 주제로 간단한 세미나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홍구 전총리, 박성룡 예술의 전당 이사장 등이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6

크레디트: 어떻게 서로를 인정하며 커 갈 것이냐

Archforum 프로페셔널 포럼, 980601

건축설계의 크레디트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15

판단은 우리가

건축사 9701

외국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하는 현상에 대한 의견을 적은 글

14

사라진 목소리: P/A의 폐간

건축과 환경 9603

우리 사무실에 이 광준이라는 직원이 있었는데, 이 친구가 어느날 나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 글을 읽었다고 하면서,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이 글을 읽고 매우 우울해졌다."라는 말을 했다. "그거 내가 쓴 건데."하니까 이 친구는 대단히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글을 쓰던 당시 미국에 있었는데 일종의 분노같은 것이 있어서 글을 쓰게 되었고, 이 글이 인연이 되어 P/A의 편집장이었던 토마스 피셔(Thomas Fisher)와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커피를 한잔 마실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막 직장을 잃고 망연자실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 이후 위스콘신 대학인가의 건축학교 학장으로 갔다.

13

License Exam에 대한 몇 가지 언질

1994년 - 1995년

아래 '포트폴리오......'에 이어 서현과 함께 쓴 두 번째 글이다. 우리는 그 당시 미국에서 학교를 마치고 김태수 선생의 사무실인 Tai Soo Kim Partners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다. 서현은 1994년에, 나는 그 보다 1년 후인 1995년에 미국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는데, 그 때 공부하면서 느꼈던 일들을 역시 메모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글의 내용이 미국에서 건축사 시험 보는 준비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인구에 회자되는 정도가 극히 미약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다만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둘이서 소위 시험이라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던 점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그 이후 1996년 말 한국에서 건축사 시험을 또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때도 농담삼아 '또 뭘 쓸까?' 하다가 '이제 그만하자.'는 식으로 웃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서현은 1998년에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라는 책으로 서점가를 강타, 일약 스타가 되었고 이후 동아일보에 장기간 글을 연재하는 등 문필을 휘날리고 있다.

12

김태수와 한국적 전통

건축과 환경 9501

내가 김태수라는, 한국이 낳은 건축계의 대가 한 분과 일을 같이 했던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지금까지 나 자신에 대한 질문 못지 않게 이 분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온 것 같다. 이 글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쓴 것인데, 잡지 특집기사의 일부로 개재되었다. 함께 일하면서도 나는 항상 그 분에게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갖고 있던 편이다. 일단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분도 그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그분에 대한 신화를 만드는 것에 지금도 관심이 없다. 그 분은 있는 그대로 알려졌을 때 가장 가치가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1

움직임의 순간: 버몬트의 건축가 터너 브룩스

이상건축 9408

터너 브룩스는 예일에 있었을 때 내 선생이었다. 나는 이 사람의 스튜디오를 두 번이나 들었는데, 솔직히 선생으로서의 기대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그 사람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지금도 이사람에게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 날의 내가 있기까지 큰 영향을 준 사람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이 글이 나가고 나서 이 사람은 한국에까지 자기가 소개된 것에 대해 매우 감격스러워 했는데, 다만 아직 글의 내용을 번역해 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Doojin, what the hell did you write about me? Grrrrr......") 항상 천연스럽고 어린애 같았던, 이 곰처럼 커다란 사람이 지금도 자주 생각난다.

10

건축의 심볼리즘에 대하여

1994년

내가 예일에 있던 당시 건축학교의 한국인 식구는 아주 조촐했다. 나 다음 해에 김광수가 왔고, 그 다음 해, 즉 내가 졸업하는 해에 이중식, 홍기원 부부가 왔다. (지금은...... 토끼가 새끼 낳듯이 늘어났다고 들었다.) 나는 졸업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동네에 살면서 김 태수 선생 사무실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김광수가 우리끼리 무슨 토론회라도 해보자고 제안을 해서 서현, 거기에 뉴욕에 있던 이남호라는 친구까지 합세하여 몇 번 모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홍기원이 "왜 세상에는 유명한 여자 건축가가 없을까?"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때 쓴 글이다.

9

건축계의 사농공상

1994년 1월 24일

아마 이때쯤부터 발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다시 말해서 그냥 글이 쓰고 싶어서 쓰는 습관이 조금씩 생겼던 것 같다. 미국 건축가 찰스 무어의 사망기념식에 갔다가 느낀 점을 쓴 글이다.

8

포트폴리오 작성에 대한 몇 가지 언질

1991년 여름

이 글은 나의 대학 동기인 서현과의 공저이다. 우리는 함께 유학준비를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메모 형식으로 손으로 써서 정리한 것이다. 애초부터 출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고 그저 필요한 사람들끼리 복사해서 보기를 기대했었는데, 생각보다 널리 퍼진 모양인지 요즘도 어디 가서 내 이름을 대면 '혹시 그 포트폴리오......?'하는 사람들이 있다.

7

글모음

1989년 3월 11일

이 작은 책자는 내가 짧은 6개월 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설계 사무실에 입사했던 첫 주에 엮은 것이다. 그 전에 여기저기 썼던 글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복사본으로 묶었는데, 아는 분들께 주고 나니 이제 나에게 단 몇 권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래는 책의 서문을 다시 적어본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특정한 시기에 대한 완결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 시기란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 그러니까 학생의 신분으로 있던 때를 가리킨다. 돌이켜보면 아마추어로서 좀 힘에 부치는 일을 했던 것도 같다. 공개적으로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쓴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그 시기는 지나갔고 나는 제대 후에 설계사무소에 취직함으로서 바야흐로 프로가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엮음으로서 지난 날을 일단 정리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작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거기에는 당분간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도 포함되어 있다. 건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보다 겸손하게 '건축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설계 사무소에 나간지 오늘로 한 주가 지났고 나는 더 없이 뿌듯한 기분에 쌓여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6

건축 및 도시비평

홈토피아

홈토피아는 계몽사에서 펴내던 잡지다. 그 당시 나는 건축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을 상대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마침 젊은 필자를 찾던 이 신생지와 연결이 되어 약 반년 동안 고정칼럼을 갖고 글을 썼다. 이 연재를 마치고 나는 군에 입대했다.

  • 건축에서의 정직이란 과제 8810
  • 서울올림픽과 우리의 건축계 8809
  • 강을 건너는 다리, 강에 머무르는 다리 8808
  • 건물과 길이 만나는 곳 8807
  • 국립 현대 미술관과 우리의 건축문화 8806

5

기사번역

플러스

  • 자유중국 건축계의 전통론 8709
  • 핀란드 건축가 레이마 피에틸래 8709

4

건축비평, 기타

건축과 환경

  • 왜?: 건축의 존재이유를 항하여 8709
  • 중소규모 상업건물의 건축적 과제 8808

3

유럽건축 기행

건축과 환경

내가 출판을 전제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건축과 환경에 유럽건축 기행을 쓰면서 부터이다. 당시 대학원 2학년이었던 나는 김경수 주간의 추천으로 글을 쓰게 되었고 약 2년에 걸쳐 기행문을 연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유럽의 하이텍크 건축 8811
  • 안토니오 가우디: 영원한 카탈로니아인 8811
  • 롱샹교회: 그 계산된 원시성 8807
  • 베를라헤의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8807
  • 비첸짜: 이탈리아의 하회마을? 8804
  • 유럽의 고딕성당들 8802
  • 하지아 소피아와 산 비탈레 8712
  • 아크로폴리스: 서양건축의 원점을 찾아 8710
  • 복원된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8701

2

유럽건축 순례기

건축탐구1987

서울 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의 학술지임. 당시 나는 페이지 메꾸기에 고심하던 편집장이었다.

1

목자(The Shepherd)

1981년 봄

이것은 영국 작가 프레데릭 포사이드 (Frederick Forsythe)가 쓴 짧은 소설, '목자'(the Shepherd) 를 번역한 것이다. 당시 나는 18세, 대학입시를 눈 앞에 둔 고3 학생이었다. 한 조종사가 하늘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홀연히 나타난 다른 비행기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착륙을 하는데, 그 다음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조금씩 긴장감을 더해가는, 호흡이 긴 문체에 재미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거친 터치의 흑백 삽화도 매혹적이었다. 나는 이 책에 꼬박 두 달을 매달려서 번역을 했는데, 정성스럽게 손으로 쓴 그 원본을 잘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결혼할 때 아내에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