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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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란 단어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감, 정체성의 결여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극복의 노력이다. 우리는 모두 원래 동물로 태어나 스스로의 동물성에 콤플렉스를 갖고 인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책도 읽고, 음악회도 가며, 결과적으로 문화와 교양, 도덕 등 소위 인간적인 가치를 소중히 할 줄 안다. 그러나 동물성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며, 인간을 복잡하고도 미묘한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동물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간적이라고도 할 만한 역설도 성립한다.

 

콤플렉스가 없는 인간은 없다. 그래서 콤플렉스를 잘 이해하면 상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종종 신념이나 소신보다는 콤플렉스에 따라 행동하고 사고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필요(need)와 욕망(desire)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런 성향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상황의 하나가 건축이나 인테리어를 할 때다. 적어도 이 순간은 사람은 제한적인 의미에서 자기 세계의 창조자가 된다. 과장해서 말하면 하느님에 준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자기 자신을 그 상황에 투사하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서 건물이나 인테리어는 삶의 구체적 필요에 대한 답만은 아니다. 이것은 소유자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영민한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또 나름대로 활용한다. 그러나 종종 이것은 집주인에 대한 일종의 문화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요즘은 다 이렇게 하거든요.'라는 말은 완곡한 협박과도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별로 필요도 없는 첨단 시설과 부담스러운 고급 자재의 '자발적인' 소비자가 된다. 바야흐로 김치 냉장고로 친구의 기를 죽이고, 적어도 이름만으로는 그냥 집이 아닌 팰리스나 캐슬에 사는 시대가 되었다. 경제학자 베블렌이 말했던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가 이제 일반 상품을 넘어 주거문화에서 드러나고 있다. 현실적 필요에 대한 충족이 아닌, 잉여에서 만족을 얻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경우 어떤 물건들은 오히려 사용하지않는데 의의가 있다. 필요 없는데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여유가 바로 그 사람의 삶의 질이다. 이제 형태는 기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따른다.

 

오해하지 말라. 인간의 기본적 욕망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왈가왈부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욕망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을까가더 흥미로운 주제다. 이런 에너지마저도 없는 사회가 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꿈도 없고 의지도 없는 사회, 우리는 적어도 이렇지는 않다. 결국 욕망은 현명한 활용을 기다리고 있는 일종의 사회적 자원인 셈이다. 바람직하게는 이런 욕망이 사회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폼 나는 집에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오히려 더 부풀리면 '내가 사는 동네를 좀 멋지게 해봐야겠다'가 된다. 나아가 '우리나라 한번 그럴듯하게 만들어보자',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더 좋게 할까'로 욕망이 끝없이 자라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이러한 욕망이 어지간해서는 자기 집 담을 넘어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공공영역은 그만큼 부실하고 저질이다. 자기 집은 최고급 인테리어로 꾸미는 사람도 발코니에는 온갖 잡동사니를 거리낌없이 내다 놓는다. 그리고 빨래건조대에 에어컨 실외기가 그 뒤를 잇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단지도 밖에서 바라보면 쓰레기를 입체적으로 쌓아놓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요즘은 다 이렇게 하거든요.'의 결과가 이것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공연장, 미술관들도 디자인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이것이 과연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시설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자본의 규모가 더 작은 민간 소유의 건물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 훨씬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런 상황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지알지 못할 뿐이다.

 

마케팅에서 이야기하는 '얼리 어댑터'(early adapter)라는 개념이 있다. 직역하면 '조기 적응자' 정도가 되겠지만, 각종 신제품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은 꼭 있다. 남들이 윈도우 98에 만족하고 살 때 아직 성능이 입증되지도 않은 윈도우 2000을 밤새워 기다려 산다거나, 전자수첩 내버리고 갓 나온 PDA를 사는 사람들이다. 돈도 많이 들고 신제품이라 위험부담도 크기 때문에 옆에서 보면 돈을 좀 한심하게 쓰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많은 산업들이 유지되기 힘들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투기라고 할 때 못지 않게 이들이 좋은 소비자임을 인정하는데는 약간의 이해와 인내가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선진국들은 대부분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런 '얼리 어댑터'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누구나 황당한 꿈이라고 생각했던 우주개발을 추진한 미국은 그 대표적인 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소중한 개념인 '선례'가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무의미하다.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하자'가 아니라 '남들이 못하니까 우리가 하자'는 생각이 우리를 용기 있고 현명하게 만든다.

 

자기 집을 짓거나 꾸미는 사람들은 더 이상 '요즘은 다 이렇게 하거든요.'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기껏해야 집주인의 '첨단 콤플렉스'를 자극하여 우매한 소비자로 만드는 전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남들이 다하는 것을 왜 굳이 하겠는가. 언뜻 들으면 남보다 앞서나가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뒷북을 치는 일에 불과하다. 게다가 옷이나 머리 모양과는 달리 건축이나 인테리어는 수명이 비교적 길다. 따라서 첨단 그 자체는 심지어 공사 기간 중에 이미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도 드물지않다. 스스로 선택하여 되는 '얼리 어댑터'는 첨단 소비자이지만,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될 필요는 더더구나 없는 것이다.

 

'첨단 콤플렉스'는 조련을 기다리는 야생마와도 같다. 진심으로 첨단을 원한다면 우리는 '얼리 어댑터'를처럼 실패와 시행착오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고도 고독한 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댓가 없이 첨단을 바랄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첨단 그 자체가 아니라 첨단의 이미지이다. 그렇게 보이고 싶은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은 과연 자기가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실험과 도전 정신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것인지, 아니면 끊임없는 자기 기만의 악순환 속으로 자신과 고객들을 몰고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