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생성: 새로운 건축사 협회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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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경제위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 도박 비슷한 심정으로 개업을 한 지 이제 2년이 조금 넘었다. 그 당시는 누구나 개업하려면 건축사협회에 정회원으로 가입해야만 했다. 적지 않은 가입비에 정기적으로 내는 회비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저런 고생도 많이 했지만, 다행히 건축계에는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들이 많아서 나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참을 것은 참고, 해결할 것은 해결하면서 그럭저럭 내 일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마우신 분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내가 개업을 할 때, 내가 회사 경영에 어려움을 겪을 때, 내가 내 경험의 모자라는 부분에 대한 지원을 필요로 할 때, 무엇보다 내가 건축가가 아닌 건축사로서 나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필요로 할 때, 인간적 호의가 아닌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그 지원은 과연 어디에서 왔어야만 했는가?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마다 왜 '나는 외로운 건축사.'라는 다짐을 자신에게 수 없이 해야만 했던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마침 새 건축사협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내 일만 하며 별다른 사회활동이 없었던 나였지만, 나름대로 건축계의 공공성을위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이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것을 분파행동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심지어 우리가 원하는 목표가 과연 기존 건축사협회 안에서 달성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원론이 아닌 경험에 의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적어도 나를 포함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는 분들의 장기간에 걸친 경험적 판단은 이제 뭔가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내용을 담기 위해서 새로운 형식, 즉 조직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예들로 가득하다. 변호사협회에 대한 민변, 예총에 대한 민예총, 의사협회에 대한 인의협 등이 그런 경우다. 브로드웨이는 오프-브로드웨이를 지나 오프오프-브로드웨이까지 분화되어 갔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 파괴적 분파행동으로 여겨졌던 이 조직들이 결국에는 모태조직, 나아가 그 분야 전체를 더 활기 있게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사안에 대해 변협과 민변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낸다고 해서 변호사들을 절대 어중이떠중이 집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드러내놓고 의견의 차이를 보이는 그 떳떳함이 부러울 뿐이다. 그러나 때때로 그들이 한 목소리를 내면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써늘한 자각으로 다가온다.
건축계도 더 이상 동질적인 집단은 아니다. 근래의 지구단위계획만 해도 사업성 저하로 건축계의 고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반면, 도시계획과 건축을 연결시켜주는 바람직한 제도로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 실천과정에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건축사의 숫자가 만 명을 넘어선 지금,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다양성을 싫건 좋건 인정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건축사 협회가 임의단체가 된 이후, 새로 개업하는 건축사들 중 상당수가 협회 가입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또 다른 대안적 조직의 필요성을 강변하고 있다.
새로운 건축사협회는 오히려 기존의 조직이 해결하고 있지 못한 문제들에 역점을 둘 것이다. 건축사법에 의해 준회원 자격밖에 주어지지 않고 있는 미등록 건축사들을 더이상 건축계의 디아스포라에 방치해두지 않으려 애 쓸 것이며, 미국의 AIA Document에 해당하는 자료를 우선적으로 만들어 사무실의 개업과 운영, 폐업에 이르는 전과정을 통한 건축사들의 귀중한 경험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전달하려 애 쓸 것이다. (협회가 만들어지면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일부터 하고 싶다.) 그리고 정당한 보수와 댓가를 요구하고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데 앞장 설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건축주를 만나거나 대관업무를 할 때, 상대로 하여금 결코 건축사 한 개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하여 건축사면허를 따는 것이 결코 '건축가'에서 '건축사'로의 신분강등이 아님을 우리는 실천으로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일단 우리의 목표를 선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수고를 거치고 난 결과에 별 것이 없다면 그 실망은 대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높은 수준의 사고와 가열찬 실천력을 겸비한 많은 인재를 필요로 한다. ('인재'! 그동안 얼마나 건축계에서 듣기 어려운 말이었던가?) 그리고 기존 협회는 물론이고이와 관련을 맺고 있는 다른 조직들로부터도 어느 정도의 저항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결국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가는 것이라는 자각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우리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앞으로 이러한 전문가들이 직간접적으로 건축계의 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예를들어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건축관계법에 대해 정작 법률 전문가들로부터 '법으로서의 극단적 유치함'을 지적 받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겠다.
무엇보다 우리가 넘어야 할 가장 높은 산은 건축계의 패배주의, 냉소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극단적인 건축지상주의, 작가주의도 함께 포함된다. 이들은 완전히 다른 태도처럼 보이지만, 결국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사회인, 생활인으로의 건축사들의 당면 요구를 해결하는데 하등 도움을 주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서 잠깐 실무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대단하게 생각하는 미국 건축가협회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해 듣기로는 다른 나라들도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았다. (제발 '내가 유학했던 나라는 달랐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달라.) 그래서 이미 사회적으로 안정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오히려 빠르게 변해 가는 우리나라야말로 세계적인 건축가 천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소망을 이전부터 가져왔다. 우린 더 이상 내려갈 데도 없다. 이제는 올라가야 한다. 꿈은 만들어 가는 것이며, 또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