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도시적 전통: 한양-경성-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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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사람과 같다. 독특한 개성과 용모를 갖고 있으며,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재생한다."      (루드비히 힐버자이머*1)

2개의 모형

광화문 뒤 임시로 지은 국립 박물관 로비에는 인상적인 모형이 2개 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과 후의 경복궁 및 현 세종로 일대를 보여주는 모형이다. 우리의 도시적 전통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이 두 모형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두 모형 사이에는 불과 몇 십 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두 모형은 근본적으로 다른 도시적 전통을 보여준다. 식민지 이전 사대의 모형이 몇 백년에 걸쳐 형성된 한양의 섬세한 도시조직을 보여 준다면, 식민지 이후 시대의 모형은 섬뜩할 정도로 오늘날 서울의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 비록 서울의 일부 지역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도시 대부분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현상들은 이미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도판 1, 도판 2)

중세도시 한양

식민지 이전 시대의 모형을 보자. 자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전형적인 중세도시 한양의 면모를 보여준다. 궁궐, 관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건물과 대지들은 작으며 도로는 이들과 정확히 도형-배경(figure-ground)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당시 헌법인 경국대전은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 높이, 심지어 장식에 이르기까지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다. 육조거리(현 세종로), 운종가(현 종로) 등을 제외하고는 넓은 길도 눈에 띄지 않는다. 중요한 몇몇 길만 동서남북 방향으로 계획되어 있을 뿐 대부분의 도로는 무계획적이고 꼬불꼬불하며 자연 촌락의 가로 구성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이 많은 것도 눈에 띈다. 일설에 의하면 한양을 계획하면서 당시 건국공신들에게 우선적으로 토지를 분배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간선도로에서 자기 집 대문까지만 길을 닦았다. 그 길 주변에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막다른 골목이 생겼다는 것이다.

오늘날 도시계획의 입장에서 보면 한양의 이러한 구성은 유치한 것이다. 한양은 오늘날 우리가 사회간접자본(소위 SOC)이라고 부르는 도로망, 상하수도 등을 별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시대를 감안할 때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한양 보다 역사가 오랜 세계의 다른 도시들에서 훨씬 더 발전된 도시하부구조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2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 신흥 군부 개혁세력의 한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한양은 깊은 뜻을 가진 도시였다. 그것은 치밀하게 계획된 상징체계에서 잘 드러난다. 한양의 도시 구조는 당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유교이념에 따른 이상적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 바로 한양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같은 건국세력이면서도 정도전과 무학 사이에는 궁궐의 방위 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대립이 있었다.*3  한편 당시 유행했던 풍수지리의 영향도 있었기 때문에 지세를 따라 어느 정도 절충을 했다. 정궁인 경복궁이 뒤에 주산인 백악(북한산)을 등지기 위해 도성의 서쪽으로 치우친 것은 이러한 영향의 결과였다. 반면 정궁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단을 배치한 것은 주례에서 유래된 좌묘우사의 원리에 충실했던 결과였다. 당시 사람들은 수질 검사와는 거리가 먼 우물물을 마시고,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는 거리를 걸으며 똥, 오줌을 비롯 각종 생활 폐수를 그대로 하천에 방류하는 삶을 살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최고 문명국가의 수도에 살고 있었다. 한양은 그들이 유교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배경이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수도 한양을 그들은 국가적 예제를 실천하는 가장 모범이 되는 곳이라는 뜻에서 수선이라고 불렀다. (도판 3)

지금의 입장에서 보아 재미있는 것은, 한양 어디에도 공원이나 광장, 공공건물 등 소위 시민들을 위한 시설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시 면적에 비해 5개나 되는 궁궐의 면적이 지나치게 큰 것 또한 눈길을 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고는 시장지역이었던 운종가 등 몇몇의 대로가 아니면, 도시를 벗어난 지역뿐이었다. 물론 이것은 세계적으로 근대시민사회 이전에 형성된 도시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양의 도시들에 비해 동양의 도시들은 이러한 전통이 매우 약했다. 결국 시민이 주인인 도시는 아니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 전통 건축에서 서양의 오페라 극장이나 콘서트 홀, 혹은 미술관 등 대중을 위한 문화시설물에 해당하는 것들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가면무, 판소리 등 공연예술도 별도의 건축적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냥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것이면 아무데서나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고도로 발달한 유동성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문화 시설물에 그만큼 투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결국 도시의 발달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식민지의 수도 경성

한양이 식민지나 전쟁을 겪지 않고 자생적인 발전을 하였더라면, 오늘의 서울은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 같은 역사도시와 유사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건물의 전체 높이가 제한되고 군데군데 궁궐, 대문 등 기념비적인 건물들이 돌출 되어 있을 것이다. 가로변의 건물들은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며, 들쭉날쭉함이 없이 연속적인 가로 경관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울은 이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이미 식민지 시대 초기에 예견되고 있었다.

우선 이것은 자본의 집중을 보여준다. 건물 하나가 차지하는 대지의 크기는 갈수록 커지며 그 과정에서 좁은 골목길은 없어지고 가로의 패턴은 점차로 바둑판 형태를 취한다. 점차로 전차, 자동차 등 기계적 운송수단이 등장하며 급기야 보행자를 물리치고 도시의 구조를 결정짓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자국에서보다 식민지 조선에서 새로운 도시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성의 전통적인 도시 조직 위에 직선으로 도로망을 계획한 당시의 항공 사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도판 4) 해군기지가 들어선 진해 같은 도시는 서구의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방사 형태로 새롭게 계획되어 오늘에 이른다. 결국 우리의 도시가 설익은 서구 도시계획 이론의 실험장이 되고 만 것이다. 장단점을 따지기에 앞서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도시적 전통을 자생적으로 발전시킬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건축가이자 시인인 이상에 대한 각종 연구에서도 나타나듯이, 지식인들 중 상당수가 우리 도시의 이상적인 모습으로서 동경 등 소위 서구화된 일본의 도시를 선망하게 되었다.*4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은 건물과 길의 관계에 있어서의 변화이다. 전통 도시에서 길과 건물은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었다. 한양의 주택들은 ㅁ자나 ㄱ자, 혹은 ㄷ자의 평면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모두 내부에 마당을 가지면서 외부로는 길을 형성하기에 적합한 형태였다. 궁궐이나 6조와 같이 넓은 터를 가진 대형 건물일지라도 그 주변에는 길의 형태를 최대한 존중하는 회랑이나 담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그 내부의 건물 배치도 내외부 공간이 서로 맞물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건물과 길은 일종의 도시적인 공간의 시퀀스에 의해 연결되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들어오면서 근대적 건물들이 들어서는 양상은 이와 사뭇 달랐다. 일단 널찍한 터에 담을 두르는 것으로 배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안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감싸고 길을 규정하기 위한 장치가 더 이상 아니었다. 단순히 사유재산과 공공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서는 건물들은 담 너머의 길과는 전혀 무관한 내적인 배치의 필요를 따라 이루어졌다. 마당은 더 이상 건물과 담에 의해 적절히 둘러싸여진 공간이 아니었다. 건물을 배치하고 남은 애매한 빈땅에 불과했다. 또한 길과 건물은 더 이상 서로 맞물려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건물과 마당, 그리고 건물과 길의 상호의존적 관계는 파괴되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도시는 전통적인 마당과 길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과정이 대단히 비도시적 개발방식의 일면을 보인다는 것이다. 건물 주위에 너른 공지가 있고 그 담 너머에 길이 있는 것은 여유 공지가 많은 농촌이나 근교에 어울리는 배치방법이다. 농촌의 길은 건물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자연 지형을 따르거나 그저 너른 터에 그어져 있는 통로에 불과하다. 전통 도시의 강력한 도시적인 패턴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이렇게 비도 시적인 패턴으로 치환되었음은 식민지 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도시적 사건의 하나였다. 중앙청, 신사 등 식민 통치의 상징적인 건물들이 여럿 들어선 것보다 더 의미 심장한 변화였다. 해방 이후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확대 심화되었다. (도판 5)

오늘의 서울

극단적으로 말해서 서울은 강북의 일부 기본적인 구조를 제외하고는 한양보다는 경성의 전통 위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이다.*5  무엇보다 위에서 제기한 건물과 마당, 건물과 길의 관계에서 이것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심화되고 있다. 서울 뿐 아니라 전국 각처에 지어지는 대형 건축물의 상당수는 길-담-주차장-건물의 패턴을 정확히 따르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 주변의 외부 공간은 주차장으로 치환되었다. 건물은 이렇게 대지 내에 담을 치고 앉아 홀로 서 있을 뿐이다. (학교, 법원, 병원, 기업체 사옥, 관공서, 심지어 주택 등을 떠 올려 보라!) 그 어떤 길과의 관계도 읽어내기 어렵다. 오히려 정문을 드나드는 차량으로 인해 보행자에게 불편만 안길 뿐이다. 그리고 그 정문은 예외 없이 수위들이 지키고 있으면서 감시의 눈길을 던진다. 법적으로 하자 없는 재산권의 정당한 행사가 공공의 영역을 위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관공서 건물들이 이 패턴에서 못 벗어나고, 오히려 앞장서서 실천해 왔다는 것은 아직도 이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물어보게 만든다. 길에서 수위실을 지나, 주차장을 건너, 없어도 좋을 계단을 올라 본 건물에 들어서는 과정이 규모와 위치에 상관없이 반복되어왔다. 현대사옥이나 대법원은 같은 원리에 의해 지어진 민과 관의 대표적 건물이다. 그리고 이 두 건물 앞을 지나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건물 사용자나 일반 시민이 길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고, 뒷면에 주차장과 후정을 갖춘 그런 건물을 지을 수는 없는가?*6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서울은 보행자에게는 괴로운 도시가 아닐 수 없다. 걷기에 좋은 길이란 손꼽을 정도이다. 인도와 차도의 구별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마치 일본 영화에서 할복한 사무라이가 내장을 땅에 쏟듯이, 가게들은 각종 물건을 인도에 늘어놓는다. 아예 당당하게 인도를 작업장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명백하게 도로 교통법이나 건축법상 위반인 인도의 주차장화가 전국 어디에서나 버젓이 만연되고 있다.*7  인도는 그야말로 양쪽에서 공격받고 있다. 아무리 자가용 족이 늘어난다고 해도 결국 시민의 대부분은 보행자다. 시민이 그 기본적 권리를 침해받고 있는 도시는 결코 좋은 도시일 수가 없다.

새로운 도시적 전통의 수립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양도, 경성도,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서울도 아닌, 새로운 도시적 전통을 만드는 것이다. 인구의 도시 집중은 앞으로도 계속 심화될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면적이 작은 나라에서 국토이용계획의 핵심은 바로 도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1. 시민의식을 키우자

도시의 주인은 시민이다. 이 간단한 원리가 우선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도시가 누구의 결정에 의해 왜 어떻게 바뀌게 되는 것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이 주체가 되어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정부가 나서서 하고, 또 대부분의 시민도 그것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간단한 생활 필수품을 하나 사는데는 까다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몇 십 년은 그 자리에 있을 건물이 지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그런가 보다'하는 것이 현실이다.

혹자는 건축 관련법규의 개선을 도시환경 개선의 선결과제로 꼽기도 한다. 실제로 다세대, 다가구 주택에 관련된 법규들은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던 많은 주택가의 분위기를 결정적으로 망쳐 놓기도 했다. 따라서 실무를 하는 건축가로서 이러한 주장에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법과 마찬가지로 건축 관련 법규 또한 최소한의 기준만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법대로만 산다면 우리의 사회에서 범죄는 사라지겠지만, 한편으로 이렇다할 인간적인 미담 또한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법의 개정만으로 한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법이 해결해 줄 수 없는 그 나머지 공백은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그 해답은 결국 문화, 시민의식, 심미안, 이런 것들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그린벨트라는, 단순한 흑백논리에서 비롯된 제도 없이도 녹지의 확보와 도시개발의 적성선 유지라는 과제를 잘 수행해 나가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거의 예외 없이 각종 시민단체의 활동이 활발한 나라들이다. 시민은 위한 공간을 만든다고 하면서 제대로 된 공청회 하나 없이 정부에서 뚝딱 공원도 만들고 건물도 짓고 하는 지금의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런 도시에서 시민은 영원히 손님처럼 살 수 밖에 없다.

2. 마음속의 도시를 풍요롭게 가꾸자

우선 마음속의 도시에 멋진 건물과 좋은 공원, 걷고 싶은 거리를 많이 만들자. 그리고 자주 나가서 그것들을 이용하자. 절약을 위해서는 잦은 외식을 삼가야겠지만, 가끔은 식구들을 데리고 극장, 연주회장, 전시장 등을 찾아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일이다. 이것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 도시의 각종 산업들이 활기를 띠고, 거리도 재미있어지며, 그만큼 안전해지기도 한다. 혹시 차를 갖고 나왔으면 인도에 주차구획선이 있어도 보행자를 위해 다른 곳을 찾도록 하자. 그런 주차구획선은 십중팔구 자기집 장사를 위해 가게주인들이 그어 놓은 것이며, 경찰의 불법적인 묵인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금을 내는 공용 주차장을 찾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야만 그저 철망을 둘러친 빈땅이 아닌, 좋은 시설을 갖춘 주차장이 더욱 많이 생길 것이다.

마음속의 도시가 풍요롭지 않으면 현실의 도시는 절대로 좋아질 수가 없다. 그러나 마음속의 도시를 풍요롭게 하는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을 반복하면 놀랍게도 현실의 도시가 풍요롭게 느껴지며, 결국 실제로 변화한다. 도시에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술과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지난 몇 십 년간의 양적 팽창이 우리에게 개선된 도시를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도시화 교육의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면서 좋은 도시를 만들 수는 없다. 내 가족, 친척, 이웃과는 정답게 지내도 산 하나 너머 사는 사람은 이방인 취급을 했던 그런 시대는 이미 갔다. 반면 이웃과는 잘 모르고 살아도 다른 먼 지역의 사람들,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발달된 통신수단을 이용, 열린 마음으로 더 친숙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 앞으로의 삶이다. 도시는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인 것이다.

3. 지금까지의 도시적 전통에 대한 반성

위에서도 말했듯이 앞으로 국민의 대다수는 도시를 삶과 일의 터전으로 삼을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 성격이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것은 거의 문명적 차원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우리의 도시들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도시적 전통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한다.

위에서 검토한 전통적 중세도시 한양의 경우, 우선 먼 거리에서 보아 시각적으로 대단히 아름다운 도시였을 것이다. 우선 자연 환경에 있어 한양은 매우 양호한 입지 조건을 갖고 있었다. 최고의 배치기준으로 삼았던 배산임수의 개념이 도시 전체에 적용된 것이다. 그리고 도시는 시각적으로 대단히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낮은 집들이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높은 성문과 궁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몇몇 외국인들은 이러한 한양의 아름다움을 극찬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도시 한양이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도시 하부구조의 취약함은 적응하여 견딘다 하더라도, 민주주의와 평등사회의 단 맛을 본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런 도시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 한양은 엄격한 신분제와 지금 기준으로는 미신에 가까운 상징주의, 그리고 전제군주의 왕권을 배경으로 하는 도시였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소수의 지배층들이 고차원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시민들이 들러리를 섰던 그런 도시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 도시의 소프트웨어에 상당히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이런 도시 한양을 그 하드웨어의 낭만적인 아름다음 만으로 굳이 우리의 귀감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 우리는 단지 그 아름다음과 의미를 소중히 기억하고 음미하되, 그와는 뭔가 다른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는 결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제복을 입은 듯한 한양의 단정한 아름다움에 비해 지금 우리의 도시들은 어떤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방 중소도시들은 어디가나 같은 모습이고 예외 없이 교통은 혼잡하며 거리와 건물은 온통 단절되어 있어 연속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나무 한 그루, 폴 한 포기 없는 곳과, 개발의 손길이 금지된 절대녹지라는 이분법이 도시를 내리누르고 있다. 한양과 같은 우주적인 상징성은 커녕, 메마른 상상력도 끼여들 여지가 없다. 그야말로 분절되고 고립된,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의 삶을 보는 듯 하다.

그러나 힙합바지를 입고 댄스 하듯이 걷는 청소년과, 무더운 한 여름에도 양복 정장을 하는 것이 사회인의 도리라고 굳게 믿는 기성 세대가 함께 어울려 살고 또 그래야 하는 곳이 도시다. 중세 도시와 같은 연속성 있는 텍스츄어를 기대할 수는 없다. 현대 도시의 혼란스러움은 우리가 자유로운 사회에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오히려 한 걸음 나아가 바로 이러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도시의 새로운 미학과 전통이 생겨날 것임을 기대하는 것이 더 유효한 태도일 것이다. 서로 다르면서 전체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또 다른 미학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도시의 과제는 사회의 과제와 다르지 않다. 정의로운 사회는 청결하고 질서 있는 도시를 만들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는 개성 있고 재미있는 도시를 만들 것이다. 인정이 있는 사회는 장애자들이 불편 없이 다닐 수 있는 도시를 만들 것이다. 시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는 관공서의 계단과 이유 없는 출입금지구역을 없앨 것이다. 창의적인 사회는 관광객이 몰려오는 도시를 만들 것이다. 마음의 도시가 먼저 풍요로워지기 전에 현실의 도시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결국 사회의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서 도시의 과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21세기를 맞아 우리의 새로운 도시적 전통을 생각하면서,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과제들을 다시 한 번 힘껏 움켜 잡아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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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설명

도판 1: 100년 전 경복궁 일대의 모습

도판 2: 같은 장소의 식민지 당시 모습

도판 3: 19세기에 제작된 목판화인 수선전도

도판 4: 일본이 현 인사동 지역에 계획했던 도로망

도판 5: 청계천 지역의 전통적 도시구조의 파괴. 자본의 집중과 길-건물-마당의 변화된 관계를 보여 준다.

주

1. 독일의 건축가, 도시계획 이론가. (1885-1967)

2. 고대 크레테와 아시리아 도시유적에 하수도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로마시대의 배수로는 지금도 일부 사용되고 있다.

3. 무학은 관악산의 불기운을 이유로 궁궐이 동향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 정도전은 군주는 남쪽을 향하는 법이며, 관악산의 불기운은 한강이 막아준다고 하여 남향을 주장하였다. 광화문 앞에 불을 막아주는 해태를 세운 이유가 이것이었다. 한편 하륜은 현 연희동 일대를 궁궐터로 주장하였으나 지세가 좁다 하여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무학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하였다.

4. 세련된 도시인을 자처했던 '모던 뽀이' 이상은 1936년 늦가을 동경으로 향했다. 거기서 그는 동경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깨지는 것을 경험하였으며, 몇 달 뒤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5. 여기에 덧붙여서 오늘의 서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은 '공포'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강남 개발의 심리적 기반의 하나가 북한에 대한 공포였다는 의견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 주제는 추후 별도의 논문으로 다룰 것이다.

6. 80년대 이후 이러한 패턴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종로 1가 교보빌딩을 위시하여 대형건물에서 담을 없애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7.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위 미관지구에서이다. 미관지구로 지정되면 건축선을 도로경계선에서 3미터 후퇴해야 한다. 당초 취지는 인도를 넓히자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오히려 인도의 주차장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미술관들이 밀집하여 문화의 거리로 불리는 경복궁 동쪽 사간동 일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발견: 서울, 뿌리깊은 나무, 1983

이규헌 (해설),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1987

서울: 제 17회 밀라노 트리엔날레 국제전시회, 서울특별시, 1989

박영규,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6

김동욱, 한국건축의 역사, 기문당, 1997

신형기, 이상이 본 동경과 서울, 그리고 근대, 이상건축, 199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