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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에 의한 인테리어

 

 

일반적으로 '인테리어를 다시 한다'고 하면 이것은 공사를 벌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마감재를 걷어내고, 위생도기를 바꾸며, 조명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 등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감재 정도가 아니라 벽이나 슬라브 등 구조체를 자르고 옮기기도 한다. 종종 공사전과 공사후는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르며, 당연히 돈과 시간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공사가 다 그러하지만 인테리어 공사도 참으로 예측곤란의 어려운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설계자 자신도 현장에서 만들어진 것을 보고 100% 만족하는 경우는 없다. 게다가 어떤 종류의 공정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신경이 곤두선다. 돈과 시간의 제약 때문에 사소한 잘못은 그냥 넘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공사에 있어서 자유로운 시행착오란 바라기 어려운 이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어려운 과정에 곧잘 뛰어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인간은 창의적이고 모험심 많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자기 세계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인테리어에 접근하는 방법도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공사를 전혀 거치지 않거나 부분적인 공사만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다. (물론 벽, 바닥, 천장 등 기본적인 것은 주어지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나는 이것을 '배치에 의한 인테리어'라고 부르고 싶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물건들을 적절하게 놓는 것을 말한다. 가구에서 시작하여 벽에 걸리는 그림, 바닥에 놓이는 조명, 그 밖의 각종 생활용품 및 장식품들을 심사숙고하여 제자리를 찾아 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도의 인테리어 디자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현실순응적인 태도로 여겨지지만, 사실 어떤 의미에서 매우 고차원적인 디자인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배치에 의한 인테리어'가 갖는 장점은 이것이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공사를 벌여 벽에 설치한 간접등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없애거나 바꾸기가 쉽지 않지만, 바닥에 놓는 플로어 스탠드는 이러저리 옮겨 다니며 분위기를 점검한 후 최종 위치를 결정해도 된다. 혹시 잘못 사왔으면 가서 다른 것으로 바꿔올 수도 있고, 만일 이사를 하면 다 싸가지고 가면 된다. 집주인은 이렇게 다양한 실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즐길 수 있다. 가구, 집기 등 갖가지 인테리어 소품을 평소부터 관심을 갖고 조금씩 사서 모으고 잘 활용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며, 때가 되면 이를 물려주는 미덕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배치에 의한 인테리어'의 대표적인 예는 굳이 먼 곳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손님을 맞는 사랑방을 생각해 보자.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조건은 비슷하다. 장판이 깔려있는 온돌바닥, 창호지가 발라져 있는 문, 회칠을 하거나 종이를 붙인 벽, 그리고 서까래가 노출된 천장이다. 별다른 인테리어 디자인이 있을 수 없고 건축과 인테리어간의 구별도 무의미하다. 그렇다고 모든 사랑방이 비슷비슷한 분위기를 갖게 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기본적인 룰만 정해놓고 벌이는 게임과도 같다. 룰이 단순한 게임인 축구가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듯이, 단순한 룰이 꼭 게임을 재미없게 하거나 수준을 낮추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집주인의 취향과 안목에 따라 어떤 사랑방은 지극히 세련되고 우아한 분위기를 갖게 되는데 반해서, 어떤 사랑방은 창고를 겨우 벗어난 수준에 머물게 된다. 그래서 방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바로 인격이다. 물건을 신중히 고르고 그것에게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 주는 것, 그래서 커다란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아주 높은 수준의 인테리어 디자인이다. 이것은 복잡하고 예민한 사고의 과정을 필요로 하며, 상당 기간에 걸친 문화적 훈련 또한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아주 잘했고, 우리는 대체로 근대사의 어느 시점에서 그 능력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어느 평자의 말처럼 ‘역사적으로 가장 조형감각이 열악한 집단’이 되어 버렸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졌을지 몰라도, 환경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미적 감각은 세계 하위권을 맴돈다. 

 

아마도 인테리어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이런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동일한 공간을 주고 선택할 수 있는 가구 및 집기의 리스트를 준다. 그리고 주어진 프로그램에 맞는 공간을 오로지 배치만으로 만들어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서 그 결과물에 대해 서로 토론한다. 요소와 요소간의 조화, 배치의 개념, 공간의 흐름 및 연결 등이 이런 실험을 통해 충분히 훈련될 수 있다. 이것은 쉬워 보이지만 절대로 호락호락한 과정이 아니다. 학생들은 제약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태도를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창의력은 제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똑 같은 교복을 입고 다니면서도 유난히 옷맵시를 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것에는 어느 정도 현실에 대한 반성이 깔려 있다. 나는 종종 우리나라에서 일년에 나오는 건축 인테리어 폐기물의 양이 얼마일까를 생각해 보곤 한다. 만약에 우리가 '공사에 의한 인테리어' 못지않게 '배치에 의한 인테리어'를 열심히 하고 있다면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한다. 환경도 더 보호될 것이고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주거 생활의 질도 더 높으면 높았지 절대로 낮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신축 아파트에 입주가 시작되자마자 전체가 다시 인테리어 공사판으로 변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도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중국에서처럼 신축 아파트를 구입할 때 아예 인테리어 공사는 빼 버리는 것이 공공의 선을 위해 더 좋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좀 더 섬세해질 것이다. 그래서 기껏 돈 들여 공사해 놓은 창문을 가구로 가려 버리거나, 집안 분위기와 맞지 않는 이상한 그림이나 장식품을 아무 곳에나 생각 없이 걸어놓는 불감증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훌륭하게 공사를 해 놓고도 사용자의 안목이 이를 따르지 못해 결국 보잘 것 없는 분위기로 전락하고야 마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본다.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생활환경의 질이라는 문제는 아직도 그리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좋은 인테리어 디자인이란 ‘전문가의 손의 의해 만들어지는, 비싼 재료를 사용한 디자인’ 정도의 인식 밖에는 없는 것이다.  


아파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요즘 짓는 아파트의 대부분은 입주 당시에 이미 상당한 정도의 인테리어 공사가 이미 되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별로 손을 댈 필요가 없을 정도다. 문제는 이 아파트들이 기본적으로 과도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데 있다. 게다가 그때그때 최신 유행을 따라 재질, 색상 등이 달라진다. 결과적으로 디자이너의 의지가 강하게 표현되는 공간이 제공되는 것이다. 개인주택이라면 모를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제공되는 공동주택인 아파트에서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상당히 의아스럽다. 아무리 시장조사를 하고 고객의 취향을 예견한다 해도 이것은 별로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결국 소비자인 입주자가 이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확률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멀쩡한 새 아파트는 다시 한번 공사장이 되고 만다. 그래서 차라리 깨끗한 도화지처럼 중성적인 분위기를 제공하고, 입주자가 그 위에 마음껏 그림을 그리도록 유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생활예술이다. 그 중 어떤 단계는 전문가의 손을 빌려야할지 모르지만, 결국 그것을 완성시키는 장본인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집주인이다. 그리고 배치에 의한 인테리어는 그 집주인이 자기의 미적 감각을 부담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집주인이 자기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만 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