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한국'에서 '건축한국'으로

현대한국 50년의 견인차, ‘건설한국’.

배포와 뚝심과 ‘하면 된다’는 의지를 퍼뜨렸고 기술력과 경영력의 기반을 형성하며 나라의 주력산업을 키웠다. 이제 다음 단계는 보다 한 차원 높은 ‘건축한국’이다. ‘건설’과 ‘건축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더 높은 부가가치산업으로 전환할 것인가? 더 높은 기술력, 설계력, 경영력을 어떻게 키워 세계시장에서 당당한 위상을 세울 것인가? <김진애·건축가·서울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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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되는 신화,건설한국

전쟁은 계속됐다. 다만 전쟁터가 백마고지에서 분당과 일산,혹은 리비아사막 등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불가능이란 없었다. 전쟁을 겪은 나라답게 조직력과 추진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안되면 되게 했고 ‘까라면 까는’밀어붙이기 정신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건설산업은 중화학공업 등과 함께 대약진의 중추역할을 담당했다. 국가발전의 견인차,건설한국의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신화는 대가를 요구했다. 이상한 문명적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밀어붙이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반복하면서 유일한 방법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앞을 내다본다’,‘미리 계획한다’는 말들은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었다. 잘못된 습관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상황을 초래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 상황을 이유로 다시 밀어붙이기를 강요했다

결국 많은 것들이 스스로 알아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부실의 상징이었다. 건설은 또한 가장 부패가 심한 산업이었다. 부실과 부패가 맞물려 건설이라는 단어가 갖는 ‘건설적’인 의미를 뿌리부터 조롱하고 있었다. 건설한국의 신화는 이렇게 해체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한 발전적인 해체다. 새롭게 열리는 시대,그것은 ‘건축한국의 시대’다

건축한국의 청사진

건축한국에서는 창작의 가치가 핵심을 이룬다. 건설은 제작이고 건축은 창작이다. 제작은 설계도와 시방서가 주어지며 결과물을 알고 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창작은 백지에서 시작한다. 제작물은 시간이 지나면 감가상각되어 가치를 잃어간다. 그러나 창작물은 재료의 값이나 시간과 무관한 가치를 갖는다. 바로 이것이 창작의 힘이다.

주택을 거래할 때 집값 빼고 땅값만으로 계산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풍토이다. 그러나 좋은 건축가가 설계한 집은 예외적으로 그 가격을 인정받는다. 전통 가옥이 꾸준한 인기를 누리는 것도 그것이 재료가 좋거나 잘 건설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설계가 좋기 때문이다. 창작의 힘을 이해하는 것에서 건축한국의 가능성은 싹튼다.

건축한국에서는 분야간의 협력이 중요하다. 다양한 전문가들이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지혜와 노력을 모은다. 한 회사 속에 여러 분야를 집어넣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생각은 이미 해체의 대상이 된 재벌기업의 발상과 다르지 않다. 전문가들은 독립적일 때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다만 전문가들의 효과적인 협력을 위해서는 훌륭한 코디네이터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 외부 전문가를 적절히 활용하면 기업이나 정부는 자체적으로 큰 조직을 운영할 필요가 없다. 유행어가 되어 버린 ‘아웃 소싱(out-sourcing)’의 개념은 건축한국에서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건축한국에서는 계획과 준비의 과정이 실행의 단계 못지않게 중요하다. 창작의 승패는 대부분 초반에 결정난다. 빈약한 아이디어로 출발한 일은 보완,수정을 해도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의 밀어붙이기란 독약이다. 걸프전이나 나토의 유고 공습에서처럼 요즘은 전쟁도 무작정 육탄전으로 하지 않는다. 치밀한 준비와 정밀한 무기가 동원되어 정해진 목표만을 공격한다(그들은 이것을 ‘외과수술’이라고 부른다). 부수는 것이 주목적인 전쟁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짓는 일에 있어서랴.

‘새로운 개선문’이라고 불리는 파리의 그랑 아르슈(Grand Arche)가 지어지기 이전에는 몇백년에 걸친 토론과 준비가 있었다. 이제 그 건물은 세계적인 명물이다.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처럼 정치적 필요에 의해 순식간에 지어진 건물과는 태생을 달리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차이는 커가기만 할 것이다.

시너지 산업으로서의 건축

건설한국이 수많은 영웅을 탄생시켰듯이 건축한국도 미래의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노가다’라는 말은 의미를 잃었다. 무식하며 내세울 것은 힘밖에 없다는 조롱섞인 이 말은 새로운 고부가가치산업 종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사고와 행동이 세련된 사람들이 이 분야의 주역이다. 사무실 건물을 지으면서 도시와 미술,그리고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대등하게 의견 교환을 하는 사람,지위나 나이보다 사고력과 설득력을 동원하는 사람,그리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성공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노먼 포스터라는 영국 건축가가 있다. 그는 홍콩의 홍콩상하이은행 본점,통일 독일의 연방의회,서울목동의 대우전자 사옥등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상대로 일을 한다. 취미로 헬리콥터를 몰고 다니는 멋쟁이이며 글과 말을 다 잘 한다. 당연히 영국의 문화적 상징이다. 그의 영향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국 경제 전반,특히 외화획득에 대한 그의 기여도가 몇 %에 이른다는 아찔한 보도도 있다. 이 때문에 여왕으로부터 작위도 수여받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영국의 건설 산업은 뒤를 따라간다. 언론은 대서특필하고 영국의 건축계와 건설업계 그리고 관련 산업들은 함께 발전의 길을 간다. 많은 책이 출판되고 전시회가 열리며 심지어 캐릭터 상품까지 나온다. 사람들은 그의 건물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온다.… 한마디로 정부와 민간의 모든 분야가 총동원된다. 그래서 신나는 장사 한판을 하는것이다. 장사도 장사지만 문화적으로도 성과를 이룬다. 가히 최고의 사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좋은 건축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프랑스,그리스,이집트를 찾는 관광객들은 건축을 통해 문화와 예술,그리고 그 사회의 총체적 역량을 본다. 우리의 불국사,수원 화성 등도 이런 기능을 유감없이 해내고 있다. 어떤 문명의 우수성을 가장 오래동안 증언해 주는 것,그것이 건축이다. 많은 분야를 꿰뚫는 파워예술로서의 건축,최첨단 시너지산업으로서의 건축,건축한국의 미래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