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대용 (읽을 만한 책: 김 태준 지음. 한길사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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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한양에서 벌어진 '한 여름밤의 음악회'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영조대왕 당시의 어느 날이었다. 남산골에 자리잡은 한 유생의 집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집주인은 당대 거문고의 달인이었는데, 어떤 새로운 악기를 소개하기 위해 저녁 무렵 친구들을 부른 것이다. 이날의 '강의식 콘서트'에서 그가 연주한 악기는 양금(철현금)이었다. 구라파에서 전래된 이 서양 악기로 그는 우리의 가락을 연주하였다. 좌중은 경탄하였고 그 자리에 있었던 조선 실학의 대가 연암 박 지원은 자신의 저서인 『열하일기』에 그 감동을 기록하였다. 아예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 밝혀놓았다. 1772년 6월 18일 유시(酉時), 그러니까 저녁 5-7시경이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담헌 홍 대용(湛軒 洪 大容)이다. 역사책에 지동설을 주장한 인물로 소개가 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의 일부가 지금도 숭실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일종의 과학자였던 그는 당시의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학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학문 연구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중요한 동반자였다. 16세부터 배우기 시작한 거문고를 전국을 유람할 때도 몸소 가지고 다녔다는 기록이 전한다.

홍 대용의 음악 편력에서 중요한 사건이 위의 양금 이야기 말고 또 있다. 35세가 되던 1776년 연행사로 북경에 간 그는 당시 북경 대성당을 찾아가 서양 신부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을 보고 그 자리에서 즉석해서 우리가락을 연주하였다. 악기 구석구석을 살펴본 그는 정확하게 그 구조와 원리에 대해 설명하여 서양 신부를 놀라게 하였고,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나라의 명만 있으면 이를 만들 자신이 있다'는 말까지 남겼다.

음악을 포함, 복합적인 학문에 대한 관심을 갖고 당대의 재사들과 교류했던 그에게 필적할 만한  인물은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음악에 대한 지식은 음악을 몸소 행하는 것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문 교육을 받고 음악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보편적인 지성과 예술적 소양의 연장선상에서 음악의 실천을 생활의 일부로 하는 경우는 그만큼 드물다. 철학에 대해 아는 것과 철학을 하는 것이 다르듯이 음악도 그러한 것이다.

홍 대용은 선비로서 무척 엄격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스승인 미호 김 원행이 스스로 가르친 내용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였다. 이를 알게 된 그는 스승에게 글을 보내 공손하나 통렬한 논저로 스승의 잘잘못을 지적하였다. '세화에 빠져서 명철한 의리를 무너뜨리고 고상한 도리를 손상시키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문하께서는 살피소서.'라는 내용이었다. 반항적인 20대에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글은,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 시대의 사제관계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한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고서야 그 어떤 사회인들 제대로 되겠는가? '음대생들은 조화와 아름다움에 대해 항상 생각하기 때문에 데모 등 반항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 격동의 80년대 초 대학당국은 이렇게 '자랑스러운' 발표를 했다. 한 전문 집단의 지성을 이렇게 정면으로 모독한 경우는 또 다시 없을 것이다.

거문고를 들고 산하를 누비며 벗들과 풍류와 지성으로 교류했던 대학자 홍 대용. 음악에서나 학문에서나 이론과 실천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노력했던 담헌선생. 그런 인물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