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은 우리가 (We Make the Deci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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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재미 건축가 김태수를 대신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필자는 미국에 유학을 가서 학교를 마친 후 김 태수의 미국 사무실에서 지난 4년간 있었다. 그러다가 올해 7월 부터 김 태수의 서울 사무실인 티에스케이 건축사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이번 특집에서의 필자 분류기준의 하나인 국내건축가, 해외건축가 중 어디에 속하는지 잘 모르겠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해외 경험이 있는 국내 건축가'라고 보아야 할 것인데 이런 구별이 별로 의미있다고 생각치 않으므로 그냥 자유롭게 글을 쓰도록 하겠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해 놓고 보면 이외로 필자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건축가들이 많은 것 같다.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했거나 혹은 그외의 다른 상황에서 외국체험을 해본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난 결과이다. 한편 국내의 정보 유입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졌으므로 한국에 앉아서 외국 건축에 대해 논하는 경우 적어도 사진, 글등의 자료는 모자라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것 같다. 극단적인 가정을 해 보면 외국 설계 사무실에 다니면서 한국일을 많이하는 한국 건축가, 그리고 국내에 있으면서 인터넷, 잡지등을 통해 해외건축에 대한 비상한 관심과 연구를 경주하는 사람이라는 두가지 경우가 다 가능한데, 그렇다면 이 두 부류에 대해 단순히 물리적인 위치를 놓고 해외파, 국내파를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본다.

이런 입장에서 필자는 `그렇다면 무엇이 의미있는 구분방식인가'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결국 이것은 작가론, 작품론의 몫이다. 건축가가 개인적으로 어느 나라의 사람이건, 어떤 경로를 거쳐 교육, 훈련을 받았던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하는 말, 행동, 생각,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작품의 내용이다. 자기가 하는 말 하나하나에 대해 일일히 유명 해외인사의 말을 인용하여 대리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국내에서 잔뼈가 굵어왔어도 의미있는 국내파라고 보기 힘들고, 반대로 역사적 조건도 시대의 요구도 다른 상황에서 나온 여러가지 해외의 조류들을 직접가서 배워왔다는 이유로 수입할 것을 종용하는 사람이라면 별 필요없는 해외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건축가의 국적이 문제되지 않는다.

얼마전 고속전철 부산역을 하면서 체험한 것을 소개한다. 워낙 큰 프로젝트였기 때 문에 국내의 한 대형 사무소와 협동작업을 하였다. 도면, 모형등 마무리단계의 대부분의 일들을 그 사무소에서 하였으나 우리 사무실이 일방적으로 설계를 이끌어갔다고는 보지 않으며 그 사무실과 많은 토론과 협의를 거친 후에야 설계안이 결정되곤 하였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것이 기차역이기 이전에 도시속에 지어지는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케일, 부산이라는 도시의 상징성, 무엇보다 가까이 있으나 접근이 어려운 바다와 도시를 연계시켜 주는 것 등이 집중적으로 토의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설계를 진행시켜 나가면서 우리가 알게된 것은 소위 한국의 `현상성'이란 것에 대해서였다. 현상에 붙기 위해서는 건물이 어떠해야 한다는 내용이 꽤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우리 사무실의 성격상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도 있어서 그냥 소신껏 설계를 했다. 뚜껑을 열고보니 우리는 입선이었는데 상위 입상작들은 기본적으로 내용이 좋으면서도 역시 현상성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었다. 특히 거대하고 매끄러운 유리의 도움으로 구성된 당선안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했던 기억이 난다. 어쩔 수 없이 덩치가 큰 프로젝트였으나 그래도 도시 스케일에 맞게 분절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우리였다. 전혀 그 반대의 설계안이 당선되는 것이 대해서는 그 안 나름대로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 결과에 상관없이 지금도 우리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김 태수의 사무실이나 당선작을 설계했던 영국 건축가나 다 외국 건축가라는 자격으로 참여했던 것인데 설계의 경향은 완전히 반대였다는 점이다. 국내의 건축계에서도 이 정도의 의견차이는 쉽게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결국 설계의 구체적 내용이 아닌 기본적 접근의 태도에 있어서는 국내 건축가냐 해외건축가냐 하는 구분이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설적이지만 건물이 기본적으로 어떠해야 한다는 판단은 설계능력과는 다소 무관한, 주체적 판단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비건축인도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고 우리는 이런 예를 많이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외국과 일을 할때 이런 것에 대한 판단까지 의뢰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명확한 문제 의식이 있으면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만 선별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해외 건축가와 협력을 하는데 있어 필자는 한가지 의문이 있다. 국내에서 해외 건축가와 협동으로 일을할 때 그 취지로서 흔히 이야기되는 것이 `선진 건축 설계 기술을 습득하고저'라는 것인데 그 말의 실체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 궁금하다. 설계가 기술일까 하는 원론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백번 양보하여 기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습득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계획이 없으면 무의미한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필자는 기술이건, 생각이건, 예술이건 간에 가장 바람직한 습득과 전달의 과정은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일어난다고 믿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때론 부딪히고 때론 서로 통하면서 함께 일을 하면서 배움을 주고 받는 것이지, 작업의 결과만이 오고 간다고 해서 무언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작품집을 사서 집중 연구를 하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단순히 일을 진행하기 위해 협력관계를 맺는 것과 배우는 것을 전제로 일을 하는 것과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역사속에서 보면 다른 나라에 대해 정말로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 편안하게 앉아 리모콘을 누르고 있지 않았다. 직접 현지에 뛰어 들어 그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실의 문제들을 다 체험하고 때로는 그 땅에서 일생을 마감하곤 하였다. 백제의 왕인이 그러했고 슈바이처가 그러했고 그밖에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무수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볼 때 개인과 개인 사이건 나라와 나라 사이건 가르침이라는 말은 함부로 쓸 것이 못된다.) 우리나라의 일을 하고 있는 많은 해외 건축가들이 혹시 자기들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건축계와 건축가들에 대한 일체의 투자와 애정이 없이 그냥 돈을 받고 일을 하는 것 뿐인 사람들이 그런 생각들을 한다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가르침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해서 의미있는 건축을 하겠다고 주장하는 외국 건축가가 있다면 적어도 이 땅에서 만사를 제껴두고 몇 달 여행을 다니던지, 아니면 학교를 다니던지 해서 한국을 알고자 하는 자기의 노력이 안락의자위의 책 몇 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한 두권의 책을 읽고 아는척 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방법인가!) 그 정도의 노력을 보여줄 의사가 없으면서 한국 건축계에 무언가 영향을 주고자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저 장사꾼일 뿐이다. 필자의 이런 말이 이상스럽게 생각되는 사람들은 반대로 얼마로 많은 한국인들이 해외로 나가 어렵게 공부하고 일하고 하면서 체험을 통해 배워왔는지 생각해 보라. 외국 건축가들도 의지만 있다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법규검토, 대관업무같은 것을 못 할 이유가 없다. 이런 내용을 설계 계약의 조건으로 한번 삼아 볼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에겐 이 마법의 단어, 온갖 콤플렉스의 근원인 `선진'이 있다. 순전히 기술적인 의미에서 선진의 의미는 명확할 것이다. 그러나 건축 설계에 있어서 선진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감탄하면서 보는 유명 해외 건축가들의 작픔들 중에 기술력이 모자라 지을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정말로 선진적인 요소는, 우리가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의외로 대답은 소박한 곳에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 하고 싶으면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그들은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일들을 정 하고 싶을 때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건축가가 이야기하면 안되는 일이 해외 건축가가 같은 소리를 하면 받아 들여지는' 바로 그런 분위기를 알기 때문에 그들을 불러 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의 내용이 정말로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 다시 말해서 우리의 근대건축 역사가 짧기 ????문에 어쩔 수 없이 덜 축적되어있는 부분들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의외로 너무나 단순한 것들일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단순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까지 외국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우리는 판단능력과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가.

우리의 판단과 식견으로 보아 우리에게 없다고 생각되는 능력이나 물자를 외부에서 빌려오는 것은 적어도 종속은 아니다. (만약 이것이 종속이면 자유무역을 하는 모든 나라들이 서로 종속관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종속은 우리가 판단까지 남에게 맏길 때 일어난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 판단할 권리가 있다. 세상없이 유명한 건축가가 `한국에는 이런 건물을 지어야 하오'라고 해도 우리가 판단해서 필요없으면 그만이다. 만약 그 의견을 받아들여서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지만, 나쁘다고 해도 그 건축가를 비난하기 이전에 책임은 우리가 지는 것이다. (훌륭한 경영자라면 경영부진의 책임을 경영 콘설턴트에게 떠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근대 이후에 얼마나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의 운명을 대신 판단해 주었는가. 일본은 아직도 자기들의 그 판단이 옳았으며 그 덕을 우리가 보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판단 능력에만 자신이 있으면 상대가 국내 건축가건 해외 건축가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든지 능력만 있으면 댓가를 지불하고 의뢰를 하면 된다. 이러한 태도는 궁극적으로 해외에 대해서도 보다 개방적인 자세를 갖게 할 수 있으며 국내 건축가들에게도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해외 건축가의 힘을 빌리는 것 그 자체보다, 그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않되겠다고 생각이 조건지워지는 것 자체가 종속인 것이다.

우리는 비싼 수업료를 내는 것을 아까와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공부는 돈이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잘 배우면 우리가 판단능력도 덤으로 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역사, 현실, 문화등 우리가 지금까지 판단을 내려온 총체적 결과물들을 갖고 있다.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우리처럼 사무치게 경험한 나라도 별로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우리의 판단에 도움이 되는 역사적 체험의 보고를 충분히 갖고 있는 셈이다. 국내건 해외건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빌려오는 것에 대해서는 아까와할 필요가 없으나 우리가 과연 어떠한 사회에서 어떤한 환경을 이루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은 결국 우리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밀려오는 외국 건축들에게 건축시장을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심에 앞서서 생각되어져야 하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