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란 시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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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승기라는 것이 차를 몇 대 정도 뜯어보았다든지, 아니면 차를 사면 꼭 튜닝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든지, 웬만한 차는 다 몰아보았다든지 해야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비교의 기준이란 지금까지 몰아 보았던 정말 몇 안 되는 차들, 그것도 현대 프레스토, 아반테, 닛산 스탠자 등 아주 일반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치고 나가는 맛이 의외로 약하다'던가, 혹은 '코너링이 절묘하다' 등과 같은 표현은 나로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장황한 구입기에 이어 시승기를 또 쓰는 이유는 여러모로 이 차에 대해 할 말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이 차를 몰기 시작한지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 글을 써놓고 나중에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감히, 시작한다......

일단 고속도로에서는 별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톨게이트에서 표를 끊고 팍 튀어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이 차를 사기 전에 읽었던 어떤 시승기에서도 그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직진도로에서 맛이 나는 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소리도 크고 차체 진동도 많아 엘란의 100 킬로는 예를 들어 아반테의 200 킬로에 해당하는 (그 차가 그렇게 갈 수 있다면) 속도감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몇 시간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나면 귀는 멍멍하죠, 어깨는 쑤시죠, 정통 스포츠 카라더니 확실히 운동도 되는 모양인지 하여간 피로가 몰려온다. 요즘은 별 이유 없이 거리계만 올라가게 하고 싶지 않아 고속도로 운행은 가급적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히 구불구불한 길에서는 감칠맛이 난다. 특히 그 길이 약간 언덕져 있으면 더욱 그렇다. 로터스의 창시자인 콜린 채프만은 이런 말을 했다. '로터스 차들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다'라고. 그 이유는 큰 엔진에 큰 출력을 가진 스포츠 카들이 직선거리에서는 더 빠를지 모르나, 속도와 핸들링의 절묘한 조화를 요구하는 곡선도로에서는 도저히 로터스 차들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도로가 직선이 아닌 점을 감안할 때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나도 매번 용기를 내어 조금씩 속도를 내 보았으나 아직도 이 차가 코너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한 바가 없다. 그러나 각종 시승기에 의하면 결국 어느 순간에서는 뒤가 돌아간다던지 한다고 하니, 바퀴로 굴러가게 만든 물건이 언제까지나 땅에 붙어 있을 수는 없는가보다. 욕심이 있다면, 정말 이 차를 잘 모는 사람과 함께 타서 그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아는 것이다.

나는 직업상 건축 현장에 자주 다니는데, 얼마 전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천안에 갈 일이 있었다. 우리 현장은 산 중턱에 있었는데 올라가는 길이 포장은 잘 되어 있지만 상당히 꼬불탕꼬불탕했다. 이전부터 '이런 길이라면 엘란이......'하고 벼르던 참이었다. 드디어 약 4주전에 현장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각오를 하고 엘란을 몰고 가서 그 길을 올랐다. 아, 그 몇 킬로의 길을 올라가면서 나는 이 차를 산 본전을 다 뽑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큰 마음을 먹고 차를 내던진다는 생각이 들다시피 몰았는데 (내 기준임), 언덕길에서 이 차는 더 힘이 나는 모양인지 그야말로 저돌적으로,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길을 얼싸안고 달리는 것이었다. 최대 회전력과 최대 출력 사이의 알피엠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부지런히 기아 쉬프트를 했는데 엔진에서 나는 굉음하며 한 마디로 맹수와도 같았다. 옆에 앉은 우리 직원은 드디어 '이 차 얼마면 사요?'하면서 부지런히 머리 속으로 주판알을 퉁기는 모습이었다. 이 차의 매력은 확실히 전염성이 있다...... 사람들이 이 차를 보고 '이게 어디 차요?'하고 물어 볼 때 느끼는 즐거움도 작지 않지만, 맹렬히 코너를 돌 때 느끼는 짜릿한 기분에 의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다음은 말도 많은 엘란의 결함, 비 새는 문제에 대해서...... 내 차는 구입 당시 다른 모든 상태가 좋았으나 소프트 탑이 1센티 정도 칼로 찢겨져 있었다. 즉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조사에 착수하여 각종 홈페이지 등에도 들어가 보고 여기저기 전화 문의도 하였다. (사소한 문제를 심각하게 연구하는 이 즐거움이여!) 간단히 꿰매는 것에서 시작하여 공사현장에서 쓰는 액체방수액을(!) 쓰는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안을 놓고 검토했는데, 역시 진리는 단순하다고 그냥 꿰매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유난히도  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일요일 오후,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를 꿰매고 있는' 나를 보던 동네 사람들의 얼굴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들이 떠올랐다. 나는 어려서부터 단추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바지단 늘리는 것도 혼자서 하곤 했기 때문에 바느질에는 문제가 없었다. 겉은 비교적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었고 안에는 혹시나 하여 투명한 본드로 실밥 주변을 살짝 발라주었다. 그리고 창문 유리 주변의 우레탄 폼에는 양 원규 씨의 권유에 따라 바셀린을 발랐다. 이제 비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이윽고 비가 꽤 많이 온 어느 날 차를 몰고 나갔다 들어 온 아내의 얼굴을 나는 유심히 살폈다. '혹시 말이지, 차에 물 들어오던가?' '응. 한 방울.' 그것으로 상황 끝이었다. 오히려 비가 오니 텐트 안에 있는 것 같아 좋았다던데?

엘란은 내가 몰아 본 최초의 기아 차이기 때문에 내가 이 차를 통해서 기아라는 회사에 대해 의견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차를 사고 보니 품질이라는 면에 있어서 큰 불만은 없다. 워낙 수공으로 만드는 차인데다가 또 통신 등에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의외로 만족스럽다는 생각이다. 내 차는 2년 정도 되었는데 얼마 전 글러브 박스의 열쇠뭉치가 깨져서 불초소생이 직접 고친 적이 있고 (농담이 아님. 구조를 연구하여 아주 잘 고쳤음.) 현재 우측 에이 필러의 안쪽 부품이 덜렁거리고 있어 손을 볼 요량으로 있다. 미국에 있었을 때 가까웠던 음악 대학 교수님 한 분이 자동차 광이었다. 1964년 형 알파 로메오를 말끔하게 복원하여 타고 다니는 분인데 자기가 젊었을 때는 당시 신사의 스포츠인 아마추어 카 레이싱을 했다나, 하여간 차에 대한 애정이나 지식이 대단한 분이다. 이 분에게 엘란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의외의 말을 했다. '기아가 만들고 있으면 아마 차가 더 좋아졌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영국 자동차 회사들이 엔지니어링은 아주 좋지만 소위 퀄리티 컨트롤이 워낙 나쁘기 때문이란다. 기아는 미국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고 품질이 좋은 차를 만들고 있으니 (스포티지 같은 것은 신문 평도 잘 받았으며 지금도 꽤 팔리고 있다.) 로터스 엔지니어링에 기아 품질이면 더 바랄 것이 없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이 양반의 말이 얼마나 신빙성을 갖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사족: 여기까지 썼는데 신문에 기사가 나왔다. 기아 차가 미국에서 가장 불량률이 높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고. 그 선생님이 이 기사를 보지 않으셨으면 한다.) 하여간 자동차 광들은 영국 차들에 대해 애증병존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규어 같은 차도 한꺼번에 세 대를 사야 한단다. 왜냐고? 한 대가 금방 고장나면 그 수리가 끝나기 전에 두 번째 것이 또 고장나기 때문이란다. 포드가 인수한 이후 품질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던가. (사족: 바로 위의 조사에 이하면 재규어가 세계의 모든 양산차 중에서 가장 품질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알 수 없는 세상이다.) 따지고 보면 세계의 명차 치고 품질의 문제를 겪지 않는 것이 드문 것 같기는 하다. 명차의 기준이 시도 때도 없이 잘 달리며 문제도 별로 안 일으키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오히려 그 차만이 줄 수 있는 개성이 큰 변수로 대두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람보르기니 하면 일단 침 한번 삼키고 발음해야 하는 명차 중의 명차지만 자동차 잡지에 나오는 평을 보면 '인테리어 마감은 웃음이 나온다', '에어컨이 있던가?'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승기에 접어들면 거의 종교적인 분위기로 싹 바뀐다. 품질은 중요하지만 그것에 얽매이다 보면 디자인의 정신이 사라지는 결과를 건축가인 나도 자주 겪는다......

기아에 대해서 갖는 불만은 정작 차 이외의 것에 있다. 이 회사의 인적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으나 짐작에 엔지니어들 정서가 지배적인 회사인 것 같다. 자동차 회사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자동차가 그저 기계가 아니라는 데 있다. 자동차는 실용품이지만 동시에 기호품이고 장난감이고 문화상품의 성격도 갖는다. 사람들은 차를 사면서 꿈을 함께 사는 것이다. 그래서 자동차 회사들은 실제 허용되는 법정 최고 속도와 무관하게 '질주 본능'이니 '지구 탈출'이니 하는 용어를 쓰고 미녀를 등장시켜 가면서 차의 섹스 어필까지 강조하는 것이다. 기아에 대한 불만은 한마디로 엘란처럼 좋은 차를 만들어 놓고 이렇게 프로모션을 못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들어가 외국의 엘란 관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화가 난다. 로터스 엘란에 대해서는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사람들도 기아 엘란에 대해서는 'Beauty is only skin-deep.'이라든지 'Takes half a day to reach 60 mph.'이라든지 하는 극도의 비판적인 어조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세계적인 명차가 엉뚱한 (?) 나라에 팔려갔다는 것에 대한 공연한 화풀이로 볼 수도 있겠지만, 기아에게도 책임은 있다. 외국에서는 엘란이 아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거나 아니면 똥차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기아는 엘란은 살아있으며 어떤 면에서 로터스 때 보다 더 좋아졌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차를 만들었으면 그만이다. 소비자가 현명하면 살 것이다.'라는 생각을 버리고 부지런히 국내외적으로 차를 알리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 전문가들에게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 차를 직접 몰아보게 하고 각종 기술적인 데이터를 제공하여 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평을 쓰도록 유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글은 전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다. 세계의 명차를 소개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 기아 엘란이 나오기는 하는데 주요한 기술적 데이터는 다 빠져있다.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는 곤란하다. 고급 스포츠카 시장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진지한 구매자들이 이러한 글의 영향을 받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제품이 좋아도 고립된 조직이 만들어내면 사람들은 일단 호감을 갖지 않게 된다. 엘란뿐 아니라 기아 차가 세계의 차가 되려면 일단 이러한 장벽을 넘어야 할 것이다. 기아에 대한 불만은 계속 있다. 엘란 카탈로그에 나오는 금발의 남녀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국내용 카탈로그에 펄펄뛰는 싱싱한 우리나라 모델을 쓰면 안 되는가? (하다 못 해 엘란 걸, 엘란 맨 콘테스트라도 열어서.....) 그리고 기아 전시장의 세일즈맨들은 엘란의 성능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한마디로 꿈을 파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최 윤수 님도 어디에선가 이야기를 했지만 엘란 전용 매장을 따로 만들었어야 했다. 그래서 엘란 클럽 분들도 드나들게 하고 고객 입장에서 거기만 가면 엘란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어야 했다. 뒤늦게 서초동에 전시장을 만들기는 했지만 엘란은 스포티지와 함께 팔 차는 아닌 것 같다.

엘란의 매뉴얼도 문제가 많다. 짐작에 이 차를 위해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기아의 다른 차종 것을 적당히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차에 대해 아주 일반적인 것 빼놓고는 알려주는 것이 없다. 물론 엘란 클럽 같은 곳에 가입을 하면 정보 교환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어떤 종류의 왁스로 차를 닦아야 하는지, 소프트 탑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내용 정도는 엘란 같은 차로서는 기본적인 관리사항이 아닌가? 이런 것까지 엘란 클럽이나 기아 모텍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이라면 소비자로서는 좀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기아라는 회사는 아이아코카가 회장으로 취임하던 당시의 크라이슬러와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술력에 있어서 크라이슬러는 포드나 지엠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의 재정이 부실하였고, 품질과 서비스 정신에서 문제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포드에서 토사구팽 당한 아이아코카를 전격 영입하였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미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기아라는 회사에 대해 감사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확실히 엘란을 도입, 개발함으로서 한국의 자동차 문화 발전에는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차는 신발이다. 왜 돈주고 비싼 것을 사리' 했던 나 같은 사람이 결국 이렇게 바뀌는 것을 보면, 개종자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기아는 현대로 넘어갔고 드디어 엘란의 생산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차를 산지 이제 두 달이 조금 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 차를 무척 좋아하게 된 사람으로서 착잡한 심정이다. 국내용으로 지금까지 1,000대를 채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이 얼마 안 되는 차들이 한국의 엘란 문화를 유지할 것이다. 중고 엘란 값이 오를지 안 오를지 알 수 없지만 오너들이 잘 내놓지도 않을 것이므로 가격은 무의미하다고 봐야겠다. 앞으로 정비, 부품 교환 등이 골치 아프겠지만 어떻게 보면 엘란의 신화는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시련을 겪을 때 더 강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우선 늦었지만 엘란 클럽에 가입을 해야겠다. 그래서 똘똘 뭉쳐 살아가는 지혜를 익혀야겠다. 엘란. 로터스에서 기아로, 그리고 이제......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차가 아닌가.

* 이 역시 최 윤수님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입니다. 잘  모르고 쓴 것 많지만

무식이 용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