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적, 내 밖의 적 (Enemy Within, Enemy With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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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통에 담겨진 물의 높이는 물통 가장자리의 가장 낮은 점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사슬의 강도는 그 가장 약한 연결고리에 의해 결정된다. 추리소설가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 시리즈 중 '공포의 골짜기'에서 이 이야기를 한 바 있고,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연결고리'라는 개념은 사회주의 혁명이론의 핵심적인 것이었다. 다른 모든 것이 아무리 강해도 어느 하나가 약하면 전체는 맥없이 무너진다. 여기에는 최대 강도나 평균 강도 같은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가장 약한 연결고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의 가장 약한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만약 그 가장 약한 연결고리가 내 자신의 능력이나 의욕 같은 것이라면 적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의 관습이나 제도, 전반적인 문화적 수준 같은 것이라면 적은 내 밖에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야기하면 적은 물론 안팎에 모두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어느 것이 더 강한 적인지는 궁금한 문제이다. 우리는 무엇과 먼저 싸워야 하는 것인가?
적이 내 안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나의 능력을 키우고 의욕을 더욱 불태우며 세상이 어떻든 나만 열심히 잘하면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도 결과가 나쁘면 그것은 내 탓이며, 다른 핑계는 비겁하다 생각할 것이다. 세상을 탓하는 것은 게으른 선비의 붓타령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을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작가주의'란 바로 이러한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여기에 나아가 '작품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라는 입장이 첨가된다. 그러나 겉으로 오류가 없어 보이는 이 생각 뒤에 종종 병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사회의 현실을 개인이 극복한다는 것은 물론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사실상 이것은 종종 인간을 극한의 한계상황으로 내모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현실의 한계에 도전하면서도, 그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것은 기껏해야 자신을 운 좋게 현실로부터 예외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슈퍼맨 신드롬과 엘리트주의의 폐해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또한 그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모순과 왜곡을 우리는 또한 모른 척 할 수 없다. 우리가 작가주의의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경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현실의 문제는 해결해야 할 대상이지, 요령껏 피해가야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방치는 결국 용납이라는 것은 이미 역사적인 교훈이기도 하다.
반대로 적이 내 밖에 있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던지 하여 사회의 모순과 악습을 타파하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노력을 하는 사람은 이 과정에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여 불행하게도 자신은 그 결과의 수혜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막상 외부의 적이 제거되어도 그만 방치해 둔 내부의 적이 여전히 자신을 억누르는 것이다. 역사에는 이렇게 혁명을 성공시켜 놓고도 정작 그 과업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던 불운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수 없이 있다. 결국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 더 빠른 길이 아니었나 하는 회의에도 빠지게 된다. 이것은 그만큼 멀고도 험한 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길을 거치지 않으면 내 안의 적과의 싸움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러한 문제는 건축가의 일상 속에 꽤나 집요하게 침투해있다. 일을 따는 것에서 진행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이러한 가치관의 문제에 직면한다. 수주를 위해 가설계를 남발하고 설계비를 덤핑했다고 하자. 그리고 공정성에 위배되는 일을 했다고 하자. 그렇게 해도 일만 열심히 잘하면 좋은 작품은 남길수 있을 것이고, 작가 소리도 들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것은 다 좋다는 자기 만족의 논리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남긴 선례는 우리 중 다른 누군가를 부당하게 괴롭히게 된다. 그래서 또 다른 좋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과정에 걸림돌이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향한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결국 이것은 적과의 내통에 다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적도 내가 배반자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나를 대할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자각은 우리 모두를 전투의 최일선으로 내몬다. 무슨 조직적인 사회운동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실상 우리들의 작업장은 저마다 작은 혁명의 무대이다. 은근히 다가오는 부당한 요구와 유혹,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움을 선언할 때,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한 댓가를 받고자 노력할 때, 그것이 당장 나를 어렵게 하더라도 나는 뭔가 귀중한 기여를 한 것이다. 그나마 이런 믿음까지 없으면 그 세상에 무엇이 우리를 지탱할 것인가?
좋은 건물을 남겨서 작가로서 인정을 받고 후대에 이름을 전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 다음 세대의 건축가들에게 좀 더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건축가의 시간이나 노력 정도는 대충 선심이나 마케팅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될 수 있는 것이라거나,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오히려 돈생각을 하면 안 된다거나, 저작권이라는 것은 고무줄처럼 신축성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무슨 제도나 법률 같은 것으로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가 최일선이며 동시에 최종 수비라인이다. 우리 중 가장 약한 고리가 전체의 노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전통이라는 것도 무슨 추상적인 이념 같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대신 싸워주고 준비해 주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선배 건축가 중 어떤 분은 소위 사전 검토비를 아주 세세콜콜한 명세서까지 첨부하여 확실하게 받아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분의 건축 작업이 어떤 것이건 간에 일단이 분은 훌륭한 선배로서 존경받을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 분이 외부의 적과 싸웠기 때문에 후배들을 포함한 다른 건축들은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노력을 줄이고 내 안의 적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작가로는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해도, 외부의 적과의 싸움을 게을리하거나, 회피하거나, 심지어 부정하는 건축가, 특히 자신의 이러한 가치관을 작가주의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강요하는 건축가에게 우리는 매우 의심에 가득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짐을 남에게 넘기는 것이다. 그 짐을 넘겨받은 사람들은 좌절하고, 굴복하며, 결국 타협하거나 포기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 지금의 상황에서 몇몇이 잘 하고 있다고 해봐야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가? 기껏해야 어떤 신비한 과정에 의해 일종의 성역 같은 것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건축계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커다란 비극은 개인적 미덕과 사회적 미덕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간격은 갈수록 넓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심지어 기득권도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다. 도무지 결이 맞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지금 필요한 인물은 세상의 고뇌를 혼자 삭이며 지고 가는 순교자인가, 아니면 그 고뇌라는 것이 없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지고 가지 않을 것을 선언하는 용기 있는 반항아인가. 복음이 아닌 순교를 먼저 가르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적은 분명히 내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내 밖의 적을 일단 없애거나 적어도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내 안의 적과의 마지막 진검승부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안의 적과 싸워 보기도 전에, 내 밖의 적에 의해 희생되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