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인, 장애인, 그리고 인테리어 디자인
...............................................................................................................................................................................................................................................
'정상인'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적 인간은 두 다리를 이용해 불편 없이 걷는다. 두 팔을 자유롭게 사용해서 물건을 들거나 옮기고, 각종 단추를 누르고 조작한다. 시력이 그다지 나쁘지 않아서 작은 글씨도 읽으며, 꽤 먼 곳에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말을 할 줄 알고 들을 줄도 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라면 그는 한국말을 잘 하는 한국인이다. 남자, 그리고 성인일 가능성이 또한 높다. 그는 화재 등 각종 재난상황에서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아, 그리고 그는 문을 오른손으로 연다. 당신은 '정상인'인가?
도시와 건축, 그리고 인테리어는 특별한 요구사항이 없을 때 이 '정상인'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다. 그런데 이 정상인의 범주에 완벽하게 들어오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다지많지 않다. 개념으로서의 정상인과 현실 속의 정상인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또 '장애인'의 개념이 있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법(장애인 복지법)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각종 설계에 그 내용이 강제적으로 적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이 '장애인' 역시 그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다. 즉, 그는 다리가 불편하여 휠체어를 타고 있거나, 아니면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이다. 그 밖의 다른 장애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이렇다할 사회적 배려가 제공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두 팔의 움직임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 문손잡이를 어떻게 돌릴 것이며, 장애인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어떻게 조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해결책인 존재하지 않는다.
'정상인', 그리고 이렇게 아주 제한적 의미에서의 '장애인'은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건축 및 인테리어 도면 속을 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정상인'도 아니며, 그렇다고 '장애인'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시력이 나빠지거나 여기저기 관절에 이상이 있는 경우, 혹은 태어나서부터 왼손잡이인 경우 등이 그렇다. 정상인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장애인도 아닌 아주 묘한 상황인 것이다.
왼손잡이의 경우를 보자. 자연발생적인 왼손잡이는 통계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인구의 10% 내외라고 한다. 다만 사회적, 문화적 억압에 의하여 그 결과적인 비율은 대체로이보다 낮게 나온다. 왼손잡이로 태어난 사람들은 부모의 지속적인 꾸지람 속에 오른손잡이가 되거나 아니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양손잡이가 되는 것이다. 이 왼손잡이가 지하철을 타는 경우, 그는 지하철 개찰구의 표 집어넣는 구멍이 항상 자기의 오른쪽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왼손에 들고 있던 표를 오른손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왼손을 대각선으로 뻗어 구멍에 표를 집어넣는다. 이 왼손잡이가 군대를 가면 그는 모든 총이 오른손잡이 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사격을 할 때마다 탄피가 얼굴 앞으로 튀어나오고, 방독면을 쓰면 필터가 걸려서 조준사격을 할 수 없는 해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정상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애인도 아닌 사람들의 수는 상상외로 많다. 그리고 한 때 완벽하게 정상인의 개념에 합치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범위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노화다. 노화는 누구나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관심은 매우 보편적인 차원의 것이다. 각종 통계자료가 노령화 사회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것은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회가 이 노화를 바라보는 시각에 이것이 장애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노부부가 서로 손잡고 황혼의 전원주택 단지를 산책하는 것과 같은 지극히 관넘적이고 통속적인 이미지 뒤에는 이들을 당연한 사회적 구성원의 일부로 보지 않으려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수 많은 소위 '실버' 단지들이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에 지어지고 있지만, 정작 노인들은 한 두 번 그럴 듯한 산책을 즐기고 나서는 삶의 무료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호화 유배지'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나마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일상적인 삶의 모습, 그 실체에 눈을 돌리게 된다. 사회와 격리된 실버 시설들 못지 않게, 일상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실버 디자인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계단 없이 바로 진입할 수 있는 건물의 입구라던가, 큼직한 글씨로 씌여진 각종 싸인물들, 미끄러지지 않는 재질의 바닥재 등 그 적용 대상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디자인은 단지 노인들에게만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삶을 전반적으로 더욱 편리하며 안전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노인이나 장애인을 위한 디자인이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매우 극단적이면서도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혹은 배리어-프리 디자인(Barrier-Free Design)의 정신이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 들여졌던 많은 디자인들이 유니버설 디자인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편파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피난계단의 문손잡이는 보통 돌려서 열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난번 대구지하철 참사에서도 봤듯이 우리는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행동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평상시라면 아무 어려움 없이 문손잡이를 돌리는 사람이라도 당황하면 결코 이를 쉽게 할 수가 없다. 손에 부상을 입고 있거나 혹은 인접한 화재로 문손잡이가 뜨겁게 달구어져 있으면 더더구나 그것을 돌려서 열 수가 없다. 그래서 소위 '패닉 하드웨어'(panic hardware)라는 것이 개발되었다. 가로로 긴 막대기 같은 것을 그냥 몸으로 밀면 문이 열리게 한 것이다. 이 디자인의 장점은 그것이 재난 상황이 아니라도 아주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또 다른 예로 계단이 있다. 디자인의 시각적 효과에 치중하다 보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난간이 없거나 있어도 아주 섬세하여 난간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굳이 노인시설이 아니더라도 이런 디자인은 극히 예외적으로나 사용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1단 짜리 계단도 문제다. 인테리어를 하다 보면 배관 등의 이유로 1단 짜리 계단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사람들이 넘어지는 원인을 제공한다. 계단의 높이가 서로 달라 발을 딛다가 깜짝 놀라는 경험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디자인은 곳곳에 존재한다. 문턱 높고 모든 방에 문지방이 있으며 댓돌에 신발을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는 우리의 전통 건축 또한 유감스럽게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정상인'들이었단 말인가.
이제 '정상인'이라는 개념의 횡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개념도 모호하고 그 실체도 매우 제한적인 이 '정상인'을 위해 건축이나 인테리어가 만들어지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일종의 장애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더더구나 없다. 중요한 것은 '정상'의 의미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정상'이라는 개념조차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다 나름대로 정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