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 나무 만한 건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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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한 실내 공간 한 구석에 껍질을 벗은 채 스산하게 서 있는 죽은 나무. 그 밑둥에는 어김없이 하얀 자갈이 박제의 미학을 완성하고 있다. 감각적이지만, 어딘지 죽음의 의식과도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분명히 하나의 미학적 경험이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의미를 읽어낼 것인가? 생명마저도 추상화시키는 극도의 관념적 의도인가, 아니면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인가, 아니면 그냥 막연한 분위기 연출에 불과한 것인가? 무엇보다 이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유행인가?

 

기계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대에 있어서 자연은 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자연은 여전히 인간 삶의 배경이기는 하되, 그 존재의 느낌은 점점 더 멀어지고 아련해져 갔다. 자연은 관조의 대상일 뿐, 우리 삶과의 직접적인 연관은 그만큼 약해졌다. 우리가 직접 자연을 상대하는 일은 그만큼 드물다. 이전에 자연에서 얻던 것을 이제 우리는 기계에서 얻는다. 심지어 물, 공기 등 삶의 기본적 요소들마저 최종적으로 기계가 처리해야만 안심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정수기, 공기 청정기 사업이 이렇게 번창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었던가?

 

우리는 자연을 거대한 생명의 공동체로 보지 않는다. 자연은 이미지이며, 색이며, 형태고 질감이다. 건물의 실내를 조경하는 경우를 보자. '나무를 심는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필요한 것은 광합성을 통해 탄소동화작용을 하며 우리와 똑같은 생명체인, 살아있는 그 나무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나무의 이미지일 뿐이다. 그래서 각종 재료로 만들어진 가짜 나무가 온갖 건물의 조경 재료로 등장한다. 물을 줄 필요도 없고, 죽을 염려도 없고, 병충해에 시달릴 이유도 없다. 게다가 사시사철 푸르고 꽃이 한번 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생명 예찬과 생명 경시가 절묘하게 혼합되면서 인간은 자연을 즐기고 있다는 나른한 착각에 빠진다.

 

결국 실내 조경에 있어서 죽은 나무의 등장은 예견되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생명이 제거된 온갖 모조품의 행렬 뒤에 이제 시신이 나타나는 셈이다. 그래서 이것은 생명체의 잔존물이면서도 생명의 흔적은 철저하게 제거된다. 껍질이 벗겨지고 가지는 단정하게 다듬어진다. 한때 생명체였던 것이 추상적 디자인의 극치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나무 바로 옆에 앉아 연인이나 친구와 아무런 정서적 저항감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이런 문제에 둔감해졌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목재를 건물의 내외장재로 사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좀 다르다. 이것은 생명을 이미지화하고 그것으로 유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훨씬 고등 생명체가있어서 우리의 육체를 관상용으로 사용한다고 했을 때 느낄만한 당혹감이 여기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디자인에 대해 약간 화를 내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 들어 부쩍 나무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개인적으로 약간의 마당을 갖게 된 탓도 있으나, 일차적으로는 직업적인 관심이다. 건축 설계에는 필연적으로 조경 계획이 들어가게 된다. 규모가 크면 조경 디자이너와 협력하지만, 작은 규모라면 스스로 해결하는 것도 방법이다. 법적인 측면은 약간의 공식만 알면 되는 것이기에 별 문제가 없다. 오히려 건축가가 직접 조경 계획을 하면 건물 및 주변 환경과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일반 조경업체에 의뢰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잘된 조경 계획은 상당히 철학적인 접근, 그리고 방대한 지식 기반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체를 가지고 디자인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아무데나 심는다고 자라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또 연약하다. 어떤 종류의 나무들은 심지어 감정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로 조경, 그리고 나무에 대한 책을 사서 읽는 일이 늘어났다.

 

다행인 것은 요즘 나무를 연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신비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나무와 사람은 서로 호흡을 나누는 사이란다. 왜? 나무는 탄소동화작용을 위해 이산화탄소를 취하고 산소를 부산물로 내놓는데 사람은 완전히 그 반대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사람 사는 곳에는 나무가 있어야 하고, 그 나무는 당연히 살아 있는 나무여야 할 것이다. 나무는 우리들 삶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그 동반자의 안녕과 건강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미학적 관점도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연에대한 인공의 우월을 지속적으로 증명해 보이려 애써왔다. 겉으로 보면 자연에 대한 정복욕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일종의 열등감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건축과 인테리어, 온갖 종류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인공물임을 항상 드러내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나무로 조경하는 것과 같이 심지어자연마저도 인공물처럼 연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경계는 다시 허물어지려 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점차 '자연스러운'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듯하다. 나무는 여전히 미학적 관조의 대상이기는 하되, 우리와 함께 생태계를 구상하는 동반자로서의 성격이 갈수록 더 중요시되고 있다.

 

이렇게 다시 '생명'이 돌아오고 있다. 스산한 카페의 죽은 나무 조경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허무한 유행에 불과하다. 이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생명의 아름다움을 일상에서 느껴보자. 살아 있는 나무를 실내에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물과 빛을 주자. 나무가 싱싱하고 그 잎에 윤기가 흐르는 집 치고 집주인이 건강하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나무는 생명체의 교감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마을 어귀마다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 곳이 많다. 사람들은 그 나무에게 제사도 지내고 심지어 이름도 붙여준다.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땅을 사서 그 소유주를 동네 어귀 나무로 지정한 드문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 나무는 세금도 낸단다. 그 나무가 없는 그 마을은 상상하기 어렵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공존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말했다. "한 그루 나무 만한 건축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