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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두진
  어느 매체?(0802) 친환경적 삶이란 무엇일까
  

(이 글은 도대체 어디 실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큰 일이다.)

몇 년 전부터 ‘웰빙’이란 단어가 심심치 않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처음에는 그냥 일시적인 유행처럼 보였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시대는 확실히 인간과 환경과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웰빙’은 그 거대한 움직임의 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런 원초적이고 중요한 개념이 굳이 영어여야겠냐는 자각이 있어 곧 ‘웰빙’은 ‘참살이’라는 우리말 신조어로 대치되었다. ‘웰빙’이건 ‘참살이’건 간에 환경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인간으로 인해 지구가 서서히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새집증후군이나 지구온난화는 나비 효과적으로 서로 엮여 있는 문제들이다. 다만 아직도 여전히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인간의 이기주의가 고집스럽게 또아리 틀고 있음 또한 느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나는 요즘 한강의 교량에 버스 정차대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 교량 위에 조경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삭막한 토목 구조물인 교량에 자연 요소를 집어넣는 것이 나쁜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과연 나무가 잘 살 수 있을까? 항상 엄청난 바람이 불어오고 관리가 쉽지 않은 그런 상황에 우리는 그저 보기 좋다고 나무를 심어도 되는 것일까? 결국 논의를 통해 조경 이야기는 없던 것이 되었으나, 문제는 우리가 이런 문제를 또 다른 생명체인 나무의 입장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같은 건축가들이 가끔 ‘기계화된 자연’의 이미지로서 고층건물의 한 부분에 허공에 달려있는 형태로 나무를 심곤 하는데 가서 보면 나무가 결국 오래 살지 못하거나, 살아있다 해도 매우 힘든 모습을 하고 있다. 생명체에 대해 몹쓸 짓을 하는 셈이다.

이런 예도 있다. 한 동안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실내에 나무를 배치하는 것이 유행했었다. 물론 분위기가 매우 근사하기는 했다. 나무 아래에서 친구나 애인과 커피를 함께 마시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이 나무들이 뿌리가 없이 죽은 것이거나 심지어 완전히 가짜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었다. 즉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그냥 꽂아 놓은 것이었다. 나는 이런 곳에 갈 때면 꼭 무슨 시체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오히려 좋지 않았다. 그냥 단순한 공간연출의 한 기법으로 보기에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왜곡된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섬뜩한 경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생명체로 대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종종 이렇게 좋지 않은 의미에서의 인본주의적, 인간중심적인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 황토가 몸에 좋다고 하면 온 야산의 황토를 다 파 해치는 사람이 꼭 나타나게 마련이다. 나무로 지은 집이 좋다고 하다가 까딱 잘못하면 산의 나무가 없어질 수도 있다. 등산이 몸에 좋다고 하다 보니 주말이면 북한산은 밀려드는 등산객들로 몸살을 앓을 지경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드러난 예가 아마도 소위 바이오 연료가 아닌가 한다. 나에겐 전 세계를 상대로 해운업을 하는 노르웨이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앞으로 바이오 연료의 사용이 확대되면 화학물질의 운송을 주 업무로 하는 자기들로서는 상당한 비즈니스의 성장이 예상된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그 바이오 연료의 개념이 옳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 연료의 생산을 위해서 옥수수를 대량으로 재배하게 되고 이를 위해 오히려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멕시코 같은 곳에서는 주된 탄수화물 공급원인 옥수수를 연료 만드는데 사용하느라 가격이 폭등,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결국 인간과 자동차가 옥수수를 두고 경쟁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이런 문제는 그 구체적인 방법론 이전에 좀 철학적인 차원의 성찰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음미할만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사람 입장에서 만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만물이 천하지만 만물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할 것이요.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나 만물은 균등한 것이오.’
이 글을 쓴 사람은 바로 18세기의 실학자 홍대용이다. 매사를 사람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당시의 성리학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이 글에서 홍대용은 사람이 아닌 우주적 관점에서 사물을 볼 것을 주장했다. 오늘날의 우주생물학(astrobiology)를 연상케도 한다. 수 백 년 전의 글이지만 여전한 현재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가 오늘 다시 살아서 위에서 이야기한 인간중심의 ‘환경친화적’ 디자인들을 보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환경친화적 삶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그중 상당수는 논의 자체가 환경친화적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을 여전히 만물의 영장으로 보고, 우리에게 여타 만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에게 좋은 것이 환경에도 좋은 것이라는 착각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물론 환경에 대한 일체의 고민 없이 무한 반복적인 파괴를 일삼는 것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지만 인간도 결국 환경의 일부일 뿐이라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는 철학적 자각 없이 결코 이 문제는 해결되기 쉽지 않다. 그것은 18세기의 조선, 그러니까 인간에 의한 환경의 파괴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홍대용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08-12-02 23: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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