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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두진
  (0807 통권663) 프라하의 카프카 vs 서울의 이상
  

몇 개월 전 ‘이상의 생가’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이 집의 파괴를 염려한 김수근 문화재단에서 매입을 하고, 이후 등록문화재 지정까지 마쳤으나 알고 보니 생가는 아니었다는 내용이었다. 즉 이상이 이 터에서 살기는 했지만, 집 자체는 그가 죽고 난 후 새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 집의 등록문화재 지정이 해지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들리기는 하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의 뜻있는 사람들이 좋은 의도로 노력하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헐려 없어진 문화예술인들의 집이 얼마나 많은가?
지난 7월 초, 나는 프라하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내 손에는 ‘프란츠 카프카와 프라하(Franz Kafka and Prague)’라는 책이 한권 들려있었다. 그의 일대기를 적은 책인데 철저하게 장소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카프카가 살았던 집, 다녔던 학교, 일했던 직장, 친구들과 어울렸던 카페, 산책했던 공원 등등 무려 38군데에 달한다. 시시콜콜한 연도들도 많이 등장하고 어지간한 건물은 건축가의 이름까지 친절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가 남긴 수많은 편지와 엽서, 그리고 그 당시 사진들이 실증적인 자료로서 또한 제시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책은 카프카의 전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살던 시대의 프라하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 책은 이러한 도시적 환경이 그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위의 두 이야기를 묶어서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은 프라하에서 돌아온 이후에 생겼다. 프라하의 골목길은 아직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고 이상이 살던 집터는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걸어서 일 이 분 거리다. 지금 이 순간 이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나의 의식 속에서 서로 가깝게 닿아있다. 우연일까? 두 사람의 삶에는 유사한 점도 많다. 20세기 초라는 인류역사의 격변기를 살았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은 시작된다. 카프카는 보헤미아의 유태인으로서 독일어로 글을 썼고 히브리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이상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던 해에 태어나 일어와 우리말로 글을 썼다. 둘 다 소위 전업 작가는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은 근대적 전문직업인이었다. 카프카는 법학박사 출신의 보험회사 간부였고 이상은 총독부에서 근무하는 건축기수, 즉 건축가였다. 그들의 인생에 여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오히려 여동생(오틀라와 옥희)에게서 구원을 찾았다. 몸과 얼굴이 호리호리했고 또 그런 사람들이 잘 걸렸던 병, 즉 결핵으로 세상을 떴다. 각각 41세와 27세였으니 요절이라는 공통점 또한 갖는다. 그들이 씨름했던 주제는 다양했으되 결국 그 공통점은 ‘근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죽고 난 이후 각각의 도시에서 받는 대접은 사뭇 다른 듯 하다. ‘프라하가 카프카고 카프카가 프라하’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로 프라하는 사후의 카프카를 맹렬히 끌어안았다. 몇몇 없어진 곳을 제외하고 그의 삶의 무대였던 수많은 장소들은 아직 그 자리에 거의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짤쯔부르그와 모차르트처럼 어떤 인물과 도시가 끈적끈적한 유대를 갖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프라하와 카프카 같은 관계는 흔치 않은 듯 하다. 카프카는 생전에 프라하의 모든 것을 숨쉬며 느끼고 기록했으며, 프라하는 그 반대로 그 작가가 남긴 흔적과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해왔다. 아니 어쩌면 프라하라는 도시가 주는 인상-어딘가 어둡고 비밀스러우며 때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자체가 카프카가 ‘성’, ‘변신’ 등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카프카는 항상 어디에선가 꿈틀거리며 살기 위해 노력하는 한 마리 벌레와도 같았다. 권력과 억압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내고자 하는 처절한 카프카적 저항의식이 향후 ‘프라하의 봄’을 거쳐 저 1989년 11월의 ‘벨벳 혁명’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상에 대한 우리 도시의 대접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아니 이상 자신부터 우리 도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그리 강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이 도시에 태어난 것부터가 그리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모던 뽀이’를 지향했지만, 그 ‘모던’이라는 것부터가 남에 의해 강요되고 있던 현실이었다. 당연히 그가 살던 도시에는 전차, 카페, 중절모 등 모던의 물리적 파편들은 있었으되, 그 정신은 없었다. 그나마 그가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던 모던한 도시, 즉 동경에서조차 모던의 실체를 찾지 못하자 그의 쇠약한 육신과 절망한 영혼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가 살았던 이 도시의 입장에서도 그리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도시가 갖고 있지 않던 것을 찾고 있었다. 그가 떠난 지 70년이 넘었고 물질적 근대화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가 추구하던 근대의 정신은 이 도시와 어딘가 불편한 관계로 남아있다. 그래서 13인의 아해가 질주하던 그 ‘오감도’의 골목길, 공포와 답답함으로 가득 찬 그 전근대적 막다른 골목들은 그가 살던 그 오래된 동네 여기저기에 지금도 실재하거니와, 닭장차와 명박산성으로 상징되는 지금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막다른 골목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서울은 아직 이상을 끌어안지 않았다. 이상과 이 도시가 서로 화해하기에는 아직도 우리가 무서워하며 달려야 할 막다른 골목들이 너무나 많다.
2008-12-02 23: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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