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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두진
  (0811 통권679) 손을 뻗어 느낄 순 없는 걸까
  

최근 우리 사무실에서는 미술가들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요즘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는 작가는 아니쉬 카푸어와 제임스 터렐이다. 마침 두 사람의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린 터라 직접 찾아가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우리는 이 두 작가의 작품에서 공간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니쉬 카푸어의 경우 작품을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스테인레스와 플라스틱이라는 매끄러운 재료의 물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오목, 혹은 볼록의 공간을 만들었다. 편집증에 가까운 작품의 완성도에 우선 놀라고, 그 다음으로는 그 공간이 갖는 감촉, 혹은 에너지의 흐름 같은 것에 압도되었다. 물론 그가 만든 것은 형태지 공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으나 결국 이것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아니쉬 카푸어의 작업은 공간과 형태가 서로가 서로를 정의하면서 무한히 연속적인 에너지의 흐름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반면 제임스 터렐의 경우 이전부터 여러 작품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학생 시절 그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몇 년 전 어떤 갤러리를 통해 그가 한국을 종종 방문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후 일본 나오시마의 어촌 마을을 찾았을 때, 그가 안도 다다오와 협력하여 만든 미나미데라 프로젝트를 가 보았고, 같은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역시 설계는 안도 다다오가 맡았다)의 상설설치 작업을 통해 그의 작업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가나자와의 21세기 미술관에서 본 그의 작업 또한 빼 놓을 수 없다.

'어둠 속에 가만히 계세요.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서서히 뭔가가 보일 겁니다. 빛이 느껴지면 그를 향해 앞으로 나가세요. 빛을 향해 손을 뻗어보세요. 두려움을 이기세요......' 예술인지, 유원지의 마술쇼인지, 아니면 심리치료 기계인지 알 수 없는 그의 작품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이 있다면 우선 예술와 과학의 결합이라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눈의 암순응 메카니즘을 이용한 작업이 많았다. 군대에서 야간사격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알고 보면 단순한 아이디어인데 그렇다고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 또한 단순하다. 아니쉬 카푸어 못지않게 제임스 터렐 작품의 완성도 또한 초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그 안에 '거(居)'하면서 느끼기 위한 작업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시각적 요소가 있지만 몸이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면 공간과 그 안에서의 거주(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라 해도)라는 이유로 해서 아니쉬 카푸어 보다 제임스 터렐이 조금 더 흥미롭다. 그러면서 동시에 현대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이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 서로 관심이 교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 건축가지만 한 마디로 요즘 건축가가 공간 이야기, 거주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본지가 한참 되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건축가들은 뭐에 관심이 있을까? 조직, 밀도, 도시, 통계, 구조와 외피, 다이어그램, 그리고 또 뭐지......아, 이미지가 있다. 우리 건축가들이 누구도 자신이 그것을 추구한다고는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것, 바로 이미지다.

적어도 대중 매체를 통해서 보건데 많은 현대 건축가들은 이제 건축이 공간을 담는 그릇이 아닌, 시각 조형물이 되고 있는데 대해 일말의 주저도 없어 보인다. 이제 그 ‘랜드 마크’라는 것이 마치 건축의 유일한 존재이유인 것처럼 되었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일단 빌바오와 두바이가 크게 한 몫 했고, 베이징과 상하이가 조금 거들었고, 요즘은 서울이 (항상 그렇지만 뒷북으로) 합류하고 있다. 건축가들에게 이제 공간은 좀 신물 나는 개념이 된 듯 하다. 근대건축의 핵심 주제면서 알고 보면 실체가 없기도 한 이 공간이라는 개념은 한 몇 십 동안 건축가들의 사고를 지배하다가 지금은 상당히 뒷전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런데 그 구태의연한 것을 가지고 작업하는 미술가들이 상종가를 치니 결국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건축가들은 공간을 너무 당연히 우리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 아닌 다름 사람들이 공간을 보다 더 '햅틱(haptic)'하게 다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놓친 것은 아닐까? 확실히 건축가들의 작업에서 공간의 물리적인 특성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람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며 나아가 인간의 신체와 어떻게 긴밀하게, 혹은 긴박하게 조우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약했던 것 같다. 끝장을 보지 못하고 내버린 것일까?

물론 변명은 있다. 아니쉬 카푸어나 제임스 터렐의 작품 그 어느 것도 정말 그 안에서 인간이 장기간 거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들이 건축처럼 법적, 제도적 제약을 심하게 받을 리도 없고, 게다가 건축이라면 줄줄이 패키지로 따라오는 각종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결국 그만큼 더 자유로운 것이다. 그래서 건축은 뭔가를 보는 앞에서 빼앗겼는데 변명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입장이 된 것은 아닌지, 이 두 명의 '침입자'들이 깨우쳐주고 있는 셈이다.

서구 르네상스 이후 건축은 미술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떠났다. 건축은 스스로 미술과 구별되고자 했고 수많은 방식을 통해 스스로의 영역을 확보해왔다. 그래서 종종 건축가들은 ‘건축은 건축이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그러나 건축은 바로 그 건축적 속성 때문에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고 종종 현실의 굴레에 메이고 만다. 바로 그 때 건축은 다시 미술을 필요로 한다. 세계 건축계가 유난히 혼란스러운 요즘, 다시 원초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 지금, 우리가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2008-12-02 23:5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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