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진의 글을 소개하는 게시판입니다. 상업 용도 이외의 목적으로 퍼가실 수는 있으나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황두진에게 있습니다.

  황두진
  건축역사학회지(1004월호?): 어느 야생동물의 생태계 보고서
  

나는 야생동물이다. 거대한 조직이나 단체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내가 만든 작은 조직을 이끌면서 살아간다. 건축계에는 나 같은 사람들을 부르는 여러가지 명칭이 있다. 독립군, 스튜디오 건축가, 작가형 건축가 등등이 그것인데 야생동물처럼 절절한 어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없다. 한편 기업화된 대형 사무실들을 ‘메이저’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아마 어디에선가는 나 같은 사람들을 ‘마이너’라고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절대로 그런 명칭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나 스스로 ‘메이저’고,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 그리고 나의 목표는 나답게 생존하는 것이다.

‘나답게 생존하기’는 소박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시시각각 변하는데다가 생존이라는 것이 그냥 죽지나 않고 살아남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꽃처럼 피어 올라야 하고, 지속적으로 결실을 거둘 수 있어야 한다. ‘나답게 생존하기’는 결국 자율성에 대한 이야기다. 작게는 나 개인의 자율성이지만 크게는 내가 속한 건축계의 자율성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야생동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중에서 한 종류를 고르고 가는 것이 좋겠다. 이왕이면 이미지가 근사한 놈으로 골라보고 싶다. 우선 나는 집단을 이루어 다니지 않으므로 사자, 영양, 물소 그런 것들은 제외다. 그렇다면 혼자 다니는 놈 중에 골라야 하는데 그렇다고 호랑이 같은 절대강자, 백수의 왕 정도는 좀 부담스럽다. 그래서 나는 표범에 마음이 끌린다. 일단 이 놈은 고양이과라서 자태가 우아하고 동작이 민첩하다. 그런데 주로 나무 위에 사는 것을 보면 자기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음 또한 알고 있는 듯 하다. 포식자이면서도 스스로 포식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미의식과 자의식을 동시에 갖고 있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든다. 게다가 나무 위에 있으니 좀 멀리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렇다, 나는 표범이다. 아니, 나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표범이다.

이 표범이 표범답게 생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표범이 육식 아닌 채식을 하거나, 아니면 줄에 묶여 받아주는 먹이를 먹고 산다면 그답게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너무나 심한 불안에 사로잡힐지 모르니 적당히 나무도 있는 곳이어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그가 쫓아가서 잡을 수 있고, 입으로 물어 나무 위로 끌어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가진, 다른 작은 동물들이 역시 적당히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표범이 살아가는 생태계다.

건축계의 표범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흥미롭다. 거창하게 말하면 생존의 역사이면서 오늘날 표범이 직면하고 있는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단 서구의 건축사를 기준으로 접근해보자. 내가 이해하는 그 흐름은 대강 이랬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표범이 없었다. 직능의 미분화,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 시대에도 건물을 설계하거나 짓는 전문화된 사람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장인에 더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직능은 있지만 자율성에 대한 생각은 강하지 않았다. 그냥 주문 받은 일을 한 것이다. 나에게 표범이란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이를 실천하는 존재다. 자율성은 직능만으로는 부족하고 여기에 자존이 더해져야 완성된다. 그리고 이것이 표범에게는 새로운 삶의 경지이면서 동시에 시련의 시작이기도 했다.

표범을 둘러싼 수 많은 세력들은 표범이 자율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역과 시대를 달리하면서 그들은 꾸준히 그 자율성을 침해하려 들었고, 그때마다 표범은 최선의 싸움을 벌였다. 여기서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 표범도 보통 내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상대와 창의적인 싸움을 벌일 줄 알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부류들이 표범이 되고자 했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상대의 무기를 빼앗아 역공을 하는 능력도 있었다. 그리고, 역시 내가 보기에, 그들은 결국 거의 모든 싸움에서 이겼다. 내가 이해하는 모든 건축의, 그리고 예술의 역사는 결국 이것이다. 그것은 자율성을 지키려는 표범들의 투쟁의 역사였다. 그렇다면 표범의 ‘나답게 생존하기’를 훼방 놓았던 그 상대는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패트론
패트론은 우리 분야로 치면 건축주다. 따라서 이것은 분명히 역설이다. 왜냐하면 표범의 기본 먹이는 바로 패트론으로부터 제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을 패트론도 알고 있기 때문에 지루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많은 경우에 패트론은 표범을 조련하려고 든다. 이렇게 자율성이 침해 받을 때 표범의 입장은 참으로 난감하다. 정면 대결은 종종 표범의 비참한 패배로 끝나버린다. 결국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수 밖에 없다. 미켈란젤로의 작업장에 나타나 조각의 코가 조금 높으니 깎으라고 했다던 교황이야말로 표범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패트론의 대표적인 존재다. 거기에 대해 표범 중의 표범 미켈란젤로는 정면 승부를 걸지 않았다. 그는 돌가루를 손에 쥐고 올라가 코를 깎는 척하면서 가루를 아래로 흘려 보냈다. 교황은 만족해서 돌아갔고 미켈란젤로는 싸움에서 승리했다. 표범이 있는 한 패트론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고전적인 줄다리기는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종교
지금 기준에서 보면 종교가 표범의 자율성을 침해하던 시기는 거의 ‘완전히’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지나갔다. 게다가 종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실상 표범들에게 가장 풍성한 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했던 젖줄이기도 했다. 당시의 표범은 자율성에 대한 생각도 그리 강하지 않아서 비교적 평화롭고 풍성한 생태계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파국은 피할 수 없었다. 다른 분야의 예를 들자면 바하는 평생을 종교적 패트론의 보호 하에 살았고, 모짜르트는 생애의 중간에 이를 박차고 나와 자발적으로 표범이 되었으며 슈베르트는 처음부터 표범이었다. 심지어 원시적 표범인 바하조차도 생전에 남긴 수 많은 서한을 통해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끝없는 싸움을 벌인 증거를 남겼다. 오늘날 더 이상 종교는 표범들에게 지속적으로 먹이를 주지도 못하고 생존의 방식에 대한 영감을 주지도 못한다. 그것은 기껏 역사의 기록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과학과 기술
창작은 항상 주관적이며 자의적이라는 의심을 받아왔다. 특히 합리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표범들의 자율성이라는 것은 근거가 매우 취약한 것일 수 밖에 없다. ‘한 잔 술에 솟아오른 예술적 영감’은 ‘어젯밤 꿈에 나타난 신선의 가르침’ 만큼이나 허망한 것이다. 구체적인 증거와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시대의 과학적 요구 앞에서 표범들은 종종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자의성이야말로 창작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일일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면 차라리 법률가가 되거나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낫다.
이런 딜레마에 대해 표범들은 역시 창의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상대의 무기를 훔쳐서 공격한 것이다. 브루넬레스키에 의한 투시도법의 발견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술은 갑자기 그 지적인 지위가 급상승했다. ‘제멋대로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매우 정밀한 원리가 있었다’로 평가가 바뀐 것이다. 워낙 예술과 기술의 결합이라고 일컬어지는 건축은 이점에서 매우 유리했다. 오늘날의 순수 미술에서도 눈의 시지각적인 반응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창작에 응용하는 제임스 터렐 같은 사람들이 있다. 표범들의 싸움은 끈질기다.

아카데미아
아카데미아는 과학과 기술처럼 학문적 객관성과 이론적 체계를 무기로 삼는다. 본능을 따르며 야생을 사는 표범들로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상대가 아닐 수 없다. 처음에 이들은 표범들의 생태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듯 했다. (예: 역사학자) 그러다가 조금씩 아예 표범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칠 수 있다는 쪽으로 입장이 선회했다. (예: 비평가) 표범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표범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자기의 삶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이론적인 토대에 놓여있는지를 선언하고 이를 실천으로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표범들도 나타났다. 결국 아무리 작품이 근사해도 이론적인 성찰로 풀어내지 못하면 일정 수준 이상의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카데미아가 선호하는 표범들이 별도로 존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은 존재하고 때로 그것은 폭발적인 계기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1968년 유럽의 뉴레프트 운동 당시 가장 보수적인 아카데미아였던 에꼴 데 보자르에서 건축 교육이 완전히 이탈하여 독립한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한국의 아카데미아는 여기서 더 나가간다. 그들은 표범을 관찰하거나 지속적으로 차분한 관심을 가지는 역할을 버렸다. 그리고 현실 권력과 연합했다. 그래서 심포지움이나 세미나실이 아닌, 관공서와 기업의 회의실에서 각종 심의와 심사 등의 명목으로 표범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표범들은 자기와 견해가 다른 상대와 대등한 입장에서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관계로 만나 결과에 굴복해야 하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일을 몇 번 겪다 보면 아예 자기 스스로 아카데미아에 편입되어 테이블의 반대편에 앉고 싶은 충동도 생기고 또 실제로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그렇게 야생을 떠난 표범은 더 이상 표범이 아니다. 적어도 표범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카데미아의 입장에서도 결국 스스로의 자율성을 포기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아카데미아의 궁극적인 무기는 생각의 힘이지 현실 세계의 권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아가 권력을 갖는 순간, 아카데미아 자신이 바로 더 큰 권력의 하부기관이 되고 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절에는 이것이 참으로 대단한 듯 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지나가면서 알고 보니 그 실체가 허망한 것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데올로기는 결국 관념이고 관념은 이상적인 것인데, 사람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존재다. 물론 수 많은 표범들이 이데올로기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했다. 또 많은 표범들이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선봉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그것은 전제주의적 이데올로기에서 심각했다. 슈페어가 그랬고 테라니가 그랬다. 소비에트 기념비 현상설계에 참여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공산당원은 아님을 주장해야 했던 또 다른 표범 중의 표범, 르 꼬르뷔지에도 있다.
이데올로기란 의외로 허술한 데가 있다. 구소련의 그 서슬 퍼런 시절에도 모스크바에는 수 많은 지하 공연단체들이 있었다. 그런데 시장 개방을 하면서 다 사라지고 말았다. 더 강한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시장
이제 지금까지 표범들이 만났던, 가장 만만치 않은 상대가 등장했다. 시장은 표범 못지 않게 유연하고 창의적이며 집요함, 인내심 또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상대의 무기를 빼앗아 싸우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 무엇보다 인간의 기본적 욕망인 물욕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발적 참여자는 무한히 줄을 서 있다. 시장의 이러한 막강한 파급력에 비하면 이데올로기는 차라리 순진해 보이기조차 한다. 이데올로기는 세뇌를 필요로 하지만 시장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본성 속에 그 욕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문지방을 넘어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장은 부부의 이불 속까지 집요하게 파고든다.
시장은 매사를 단순하게 바라본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을 찾아온 한 젊은 외국 투자가는 ‘한국 시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관심 없다. 치고 빠질 기회를 보고 온 것인데 왜 그런 관심이 필요한가?’라고 오히려 기자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이 일화만큼 시장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시장이 표범을 대하는 입장 또한 단호하다. 얼마에 거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길들여 가축을 삼을 수 있는가? 지금까지 표범이 싸워 온 상대 중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후안무치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게임은 끝난 것인가? 표범들은 오랜 시간 동안 힘들게 싸워 지킨 야생의 자율성을 내주고 서서히 표범답게 생존하기를 중단할 것인가? 나는 물론 그 답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때론 나 자신이 서서히 가라앉는 타이타닉에 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사실 주변의 표범들이 이미 너무 많이 사라졌다. 게다가 전형적인 중상주의적 화란 사람 렘 쿨하스처럼 아예 시장적 가치를 자기 건축의 형식적, 내용적 동력으로 삼는 신종 표범들도 등장했다. 다국적 자본을 등에 업고 전세계를 상대로 일하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컨텍스트는 중요치 않다’라고 과감히 선언하는 엠브알디브이(MVRDV) 같은 뻔뻔스러운 표범들도 빠질 수 없다. 그들은 표범이라고 하기에는 왠지 느낌이 통하지 않는다. 아마 같은 종이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인지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표범들이 창의성은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것 같다. 게다가 이제 표범은 혼자가 아니다. 생물다양성의 총체적 위기를 느낀 다른 종들이 서서히 대열에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같은 그들을 대표하는 집단이 바로 가장 고전적인 부류, 즉 인문학자들임은 새삼 이야기할 필요로 없을 것이다.

미디어
히틀러에게 괴벨스가 있었다면 시장에게는 미디어가 있다. 평상시의 미디어는 대체로 즐겁고 별로 해롭지 않은 존재다. 문제는 미디어가 별안간 자기의 속성을 드러내는 순간에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의 미디어는 이 세상의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다. 글과 이미지, 그리고 동영상이 결합하여 이렇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대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와 동영상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고 있는 고전적 미디어인 문자 텍스트는 자율성이 유기된 또 다른 예로 기억될만하다.
미디어의 또한 시장처럼 관심사가 명쾌하다. 왕이 누군가? 일렬로 줄 세워 순위를 매길 수 있는가? ‘나답게 생존하는 표범이면 다 왕’이라는 지극히 표범스러운 생각은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미디어는 항상 스타를 필요로 하고, 표범들 사이의 서열에 관심이 있다. 미디어를 통해서 본 세상은 그래서 실제보다 더 잘 정리되어 있는 듯 하나 사실은 적막감이 가득하다. 억지로 순위를 매겨 놓다 보니 표범들간에도 불편함이 감돈다.
………………………………………………………………………………………………………………………………………………………………….

대강 이러한 내용이 나라는 표범이 살아가고 있는 생태계에 대한 생각들이다. 멸종에 대한 두려움, 가축이 되는 것에 대한 더 큰 공포, 자율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 나다운 것과 생존 사이의 간극들. 이런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왜 자율성, 이런 것들이 문제되느냐고 물어본다면 ‘그것 때문에 건축을 했기 때문’이라고, ‘창작의 즐거움 이상의 그 어떤 가치가 이 분야에 있냐’고 반문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요즘 새롭게 주목하고 있는 것은 상대가 갖고 있는 무기들이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이 건축과 결합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생태계에 대해 관심이 간다. 어쩌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건축가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건축적 표현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그리고 미의식과 자의식은 못 버리겠지만 먹이 정도는 바꿀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쩌다 먹는 큰 먹이가 아닌, 자주 조금씩 먹는 방식은 어떤가? 예를 들어 자본을 소유한 기성 세대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연령대를 모두 상대하면서 할 수 있는 건축이란 무엇일까? 우리에게 십대와 이십대를 아우를 콘텐츠는 없는 것일까?
표범은 주위를 둘러본다. 생태계가 많이 변한 것 같지만 여전히 정글의 법칙은 유효하다. 다들 자기의 생존의 방식이 있고 남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강한 자가 살아 남겠지만 살아 남기 위함 이상의 힘을 쓰지도 않는다. 딱 필요한 만큼의 먹이를 구할 뿐이다. 생존만큼 철저한 경제적 기준에 이해 작동되는 것도 없다. 표범은 이러한 야생의 냄새가 좋다. 표범은 야생동물이다.

2010-05-23 01:20:02


   

관리자로그인~~ 전체 113개 - 현재 1/8 쪽
황두진
2010-05-23
2029
112
황두진
2008-12-02
2097
111
황두진
2008-12-02
1762
110
황두진
2008-12-02
2163
109
황두진
2008-12-02
1864
108
황두진
2008-12-02
1985
107
황두진
2008-12-02
1956
106
황두진
2008-12-02
1948
105
황두진
2008-12-02
1701
104
황두진
2008-12-02
1636
103
황두진
2008-12-02
2390
102
황두진
2008-12-02
2634
101
황두진
2008-12-02
2387
100
황두진
2008-12-02
1761
99
황두진
2008-12-02
1786

[맨처음] .. [이전] 1 [2] [3] [4] [5] [6] [7] [다음] ..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