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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두진
  미발표 (060802) 기계의 선, 예술의 선
  

(아래 글은 모 출판사의 의뢰로 쓴 것인데 출판사 사정으로 기획이 불발되어 미발표.)
몇 년 전부터인가 나는 선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것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었다. 총연장 18킬로미터라지만 막상 걸어보니 상당 부분이 소실되거나 심지어 출입 금지 구간이었다. 하지만 산이라는 자연과 도시라는 기계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그 느낌에는 독특한 것이 있었다. 성곽의 성격상 지도를 들고 다니며 탐색하다보면 어느 덧 출발지로 되돌아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어느 방향으로 돌아도 마찬가지였으나 나는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면 태양과 함께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또 다른 선은 한강이었다. 열린 곡선인 한강은 닫힌 곡선인 서울성곽과는 달리 방향이 명확했고 시작과 끝이 있었다. 나는 때로는 자동차를 타고서, 또 때로는 걷거나 혹은 자전거에 올라 그 유장한 흐름을 따라 다녔다. 물가에 서서 바라보는 한강은 다리 위를 지나면서 보는 것과 매우 다르다. 거대한 물이 넘실거리는 그 모습은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다.
이렇게 서울성곽과 한강이라는 선을 따라다니는 것은 내 나름대로 내가 살며 일하는 도시인 서울을 몸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건축가로서 ‘나의 도시 읽기’를 했던 셈이다. 결국 이런 내용들을 담아서 2005년 연말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한창 그 책의 원고와 씨름하고 있던 2005년 여름이었다. 나는 또 다른 선을 찾아 가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전수천 선생으로부터 처음 ‘무빙 드로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 황당함에 놀랐지만 곧 그 황당함에 매력을 느꼈다. 이것은 내가 이전에 따라 다니던 선들과 비교했을 때 종류, 규모, 그리고 장소 모든 것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있었다. 서울성곽과 한강, 그리고 ‘무빙 드로잉’ 이 세 가지는 모두 기계화된 선이었다. 한강은 원래 자연 하천이었으나 1980년대의 한강 종합 개발을 통해 매우 기계적인 하천으로 다시 태어났다. 겸재 정선의 화첩에 담긴 한강과 지금의 한강은 경로는 일치할지 모르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 복잡하게 얽혀있는 배수로와 도로, 교량, 강둑 등은 흘러가는 강물과 함께 엄연한 한강의 일부다. 봉준호의 영화 ‘괴물’에 나오는, 무언가 숨어 있을 것 같은 그 거칠고 음산한 한강이 바로 이것이다. 서울성곽은 어떤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산 능선을 따라 지어진 이 구조물은 현재 그것이 갖고 있는 유장한, 심지어 낭만적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군사시설이었다. 동시에 도성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들고 나는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통치 수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성격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가까운 인왕산이나 북악산 주변의 서울성곽은 아직도 그 군사 및 통치 기계로서의 야성을 잃지 않고 있다.
‘무빙 드로잉’은 여기서 한 단계 더 전진해 있다. 한 때 우리가 철마(鐵馬), 즉 철로 만든 말이거나, 심지어 철마(鐵魔), 즉 철로 만든 괴물이라고 불렀던 기차, 즉 서구문명의 상징이며 동시에 우리에게는 망국과 식민지배의 전주곡이었던 그 기차는 이제 전수천의 붓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차는 우리를 싣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연과 기계의 복합체 사이를 뚫고 달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대평원이나 기차가 힘든 숨을 쉬며 넘어야 했던 록키산맥 만이 이 프로젝트의 캔버스는 아니었다. 뉴욕과 필라델피아, 워싱턴을 거쳐 시카고, 센트 루이스, 그리고 로스 엔젤레스로 이어지는 저 거대도시 네트워크라는 복합 기계 또한 프로젝트의 필수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만주 벌판이나 시베리아를 제쳐두고 전수천이 미국을 먼저 선택했던 이유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즉 ‘무빙 드로잉’이라는 예술의 선을 긋기 위해서 전수천은 자연 못지않게 기계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것이 기계에 대한 콤플렉스를 서서히 극복해 나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전수천의 무빙 드로잉이 갖는 심층적인 의미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나로 하여금 자연과 인간, 기계와 예술이라는 네 가지 주제에 대한 생각을 촉발하고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기계란 어떤 의미에서 인간성의 중요한 일부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기계란 자연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들어지며 그런 점에서 자연의 연장이거나 심지어 그 일부이기도 하다. 이렇게 기계를 이해하지 않고서 인간, 특히 현대의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자연마저도 그러하다. 아마존의 오지 등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가 아는 자연의 대부분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기계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기계를 이해해야만 역설적으로 자연도 그 본성을 유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성의 가장 심오한 표현인 예술에 있어서도 이제 기계는 단순한 도구만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새로운 성찰과 자각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순수한 자연주의자들이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문제다. 한국의 중견 예술가로서 역사적으로 기계와의 험난한 투쟁 속에서 성장했던 세대에 속하는 전수천, 그는 지금 바로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06-11-10 22: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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