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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두진
  (0704 18호 통권146) 터미널의 통과의례
  

머무르기 위한 공간이 있고 통과하기 위한 공간이 있다. 그런데 현대 건축가들은 이동하기 위한 공간에 대한 집착이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통과하기 위한 공간조차도 머무르기 위한 공간처럼 다루고 싶어 한다. 아니 아예 그런 이분법 자체를 거부하는지도 모르겠다. 도시의 거리는 그 대표적인 예다. '도시는 선이다. 차선을 지키자'라는 구호가 유행하던 시대가 있었다. 겉으로 보면 운전자들에게 하는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도시민 전체에 대한 지시였다. 모두들 가장 신속하게 목적지로 이동하여 맡은 바 소임을 다하라는, 산업사회의 보이지않는 규율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요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좀 거닐고 싶어 한다. 그래서 걷고 싶은 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건물 안에서도 복도나 계단 같은 것들이 갑자기 중요해졌다. 복도 여기저기에 앉거나 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계단실은 일종의 나선형 전망대처럼 생각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조차도 이동수단이 아닌, 잠시 쉬어 가는 기분 좋은 공간으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이제 사람들은 움직이면서도 머무를수 있기를 바란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라는 낯 익은 콤비가 만든 영화<터미날>은 이렇게 통과하기 위한 공간이 머무는 공간이 되었을 때 벌어지는, 황당하지만 흥미로운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솔직히 이 영화는 두 사람의 경력에서 외전(外典)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할 듯하여, 오히려 영화 외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동구권의 어느 가상 국가 출신인 빅터 나보스키가 뉴욕 제이에프케이(JFK)공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그의 조국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그는 여권도 비자도 효력이 없어진 무국적자가 되고 이후 몇 개월간 터미널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런 기본 줄거리에 스튜어디스와의 연애, 아버지와의 약속, 조국에 대한 애정 등 적절한 양념들이 더해져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 최대의 즐거움은 역시 갑자기 공항 터미널에서 살게 된 이 불운한 남자의 대단한 생활력을 지켜보는 것에 있다. 그는 '승리자(Viktor)'라는 이름답게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오늘날의 공항 터미널은 이미 하나의 작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아니 심지어 어떤 공항들은 그 자체로 여행의 목적지가 되기도 한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유럽이라면 네덜란드의 스키폴(Schiphol)공항이, 아시아라면 싱가포르의 창이(Chang-i)공항이 이렇게 놀러가고 싶은 대표적인 공항들이다. 오히려 연결 항공편이 바로 붙어 있지 않기를 바랄 정도다. 그런 점에서 하필 제이에프케이에 갇힌 빅터는 운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대대적으로 고친 이후인 것이 다행이랄까.

이러한 차이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상 공항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공항들은 자본 논리에 충실하여 운영적인 측면에서도 상업 시설들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살 것, 먹을 것의 제공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이런 성격이 강하다 보니 문화적 측면이 약하다. 마치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스키폴이나 창이는 이런 문제들을 잘 극복하고 있는 예들인데, 매우 충실한 공연 및 전시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냥 터미널에 머물러 있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의 인천공한은 이런 점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 승객 처리 능력 등 통과하기 위한 시설로서의 기능이야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공항을 그런 시선으로만 보는 것 자체가 이미 낡은 개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훌륭하지만 별로 재미나 매력은 없는 공항인 셈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이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질(quality)'을 넘어선 '개념(concept)'의 문제 말이다. 온 세상의 빅터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2008-12-02 22: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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