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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두진
  (0711 31호 통권159) 피터 그리너웨이와 실험정신
  

엔니오 모리코네는 화가 나서 돌아가버리고, 레드 카펫 위의 여배우들은 노출이 지나쳤고, 셔틀버스는 영화 시간과 연계되어 있지 않아 불편했고, 게다가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해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언론의 기사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나마 그중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은 피터 그리너웨이의 마스터 클래스에 대한 기사였다. 그는 60대 중반이라는데 신랄하기가 막 데뷔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결코 고집불통 영감의 독백 같은 것은 아니었고 상당 부분 공감이 갔다. 마치 내 분야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건축계에 어느 정도의 팬을 확보하고 있는 감독이다. 일단 건축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가 크다. <건축가의 배 The Belly of an Architect>에서는 아예 제목에 건축가가 등장하고 있고,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으로 번역된 'the Draughtsman's Contract'도 직역하자면 '제도사와의 계약'이다(물론 이 영화에서의 제도사는 건축가보다는 화가에 가까운 사람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가 건축가들 사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많은 건축가들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분야인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서 상당히 지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듯하다.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도 많아서 관객 자신이 나름대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지 못하면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를 만든다. 스스로를 '영화만드는 화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다 보니 난해하고 그로테스크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지만, 사실상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바로 그러한 지적인 긴장감이 스스로를 지적 창작인(cerebral creator)으로 여기는 건축가들에게도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복잡한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알아보는 것이다.

'리모컨이 나오면서 고전적인 의미의 영화는 죽었다'거나 '첨단 테크놀로지를 잘 구사하지 않으려면 앞으로 감독이 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강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영화 만들기에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라 하더라도 이렇다 할 실험 정신이 없었다면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고, 말한다고 해도 효과가 별로 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그 분야의 미래에 대해서 통찰력이 담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시장의 논리가 다른 모든 것을 서서히 압도해가고 있는 지금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피터 그리너웨이 같은 존재가 갖는 의미는 영화계 이상의 것이다. 예술 창작에 있어서 테크놀로지가 갖은 의미에 대한 논의는 분야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에서도 이미 19세기의 비올레 르 뒤크나 고트프리트 젬퍼같은 인물들에 의해 이 문제들이 심도 있게 논의된 바 있었다. 지금도 몇백 년 전과 같은 재료, 같은 방식으로 건물을 지을 수도 있고 그 중에서도 나름대로 걸작이 나올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장기적인 건축의 흐름은 거의 예외 없이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이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전개된다. 이것은 이론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작가의 예술적 감성 같은 것이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가 되고 마는 폐단도 발생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분야의 저 깊은 곳에서 서서히 흐르고 있는 거대한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냐 마느냐하는 것은 그 분야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다. 그래서 대중적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피터 그리너웨이 같은 감독의 존재가 오히려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한국 영화계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누가 어떤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2008-12-02 23: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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