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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두진
  (0712 33호 통권161) 통섭(統攝)의 시대
  

1920년대 유럽 건축에 대한 전시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종종 이런 전시회는 마치 건축가가 모든 것을 혼자서 평가하고 결정하고 진행한 것이라는 암묵적인 가정을 깔고 진행된다. 고도로 독립적인 존재,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작가라는 이미지로 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전시회와 더불어 그 당시에 등장했던 음악과 미술, 문학, 영화, 그리고 심지어 과학 기술 분야의 움직임 같은 것을 포괄적인 시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곁들여 진다면? 즉 건축 전시회에 이런 내용을 일부 포함하거나 아니면 음악회, 강연회, 영화시사회 등이 전시 기간 중에 열린다면? 그래서 당시 건축가들이 어떤 사회적, 지적, 예술적 상황에서 작업했는지 잘 드러내 보여준다면? 아마도 깊이와 폭, 그리고 영감을 동시에 확보하는 매우 훌륭한 문화 행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런 식의 생각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굳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속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네트워크 속에 존재하며 다른 사람들과 끊임 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심지어 창작이란 결국 ‘기존의 생각들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noble combination of existing ideas)이런 견해도 존재한다. 따라서 한 사람의 작가를 소개할 때 그 작가의 상황, 나아가 그의 상황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물론 종종 상황을 뛰어 넘는 돌출적 능력을 보여주는 작가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작가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바로 통섭적인 시각이며, 이것이 아주 새삼스럽게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얼마나 우리가 무의미한 분야 간의 장벽 속에 살아왔는가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매우 유장한 통섭의 전통이 있다. 자기 분야에 정통하면서도 다른 분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보인 사람들의 리스트는 끝이 없다. 학생 시절 전통 건축 답사 도중 소론의 영주였던 윤증의 고택을 찾았을 때, 그 집 종부가 보여주는 천문도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적이 있다. 자기가 막 시집왔을 때만 해도 집안 어른들이 대청에 모여 앉아 천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정통 학자관료였던 서유구는 그의 방대한 저작 ‘임원경제지’에서 마치 현장에서 보고 이야기하듯이 하나의 건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얼마 전 작고한 타악기 주자 흑운(黑雲) 김대환 선생은 반야심경 사경의 명인이었다. 제학문의 대가 세종대왕이야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도 없다. 한 마디로 대단한 통섭적 내공의 소유자들이 만들어온 나라인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마치 조금만 분야가 달라도 서로 대화할 방법을 못 찾고 심지어 다른 분야는 알 필요도 없다고 믿는 우리 후학들이 문제다. 자연과학이나 기술의 발달을 이해 못하는 인문학자, 반대로 과학기술의 인문학적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연과학자는 사실상 이제 사회에서 별 쓸모가 없다. 결국 이 통섭이라는 개념은 근대화 과정에서의 지나친 세분화와 전문화에 대한 반성과 모색의 과정에서 새롭게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에 있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몇 년 전 있었던 전시회가 하나 생각난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별로 세간의 주목은 받지 못했지만 다름 아닌 노벨상 전시회였다. 전 세계를 순회하던 이 전시회의 특징은 수상자가 아닌 그 수상자들을 배출한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전시회를 기획한 의도가 흥미롭다. 역대 수상자들의 배경에 대한 자료를 검토해 보니 어떤 패턴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즉 특정 시기, 특정 장소를 중심으로 수상자들이 집중되어 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시카고 대학이 수많은 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닐스 보어 연구소가 역시 많은 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 등이 좋은 예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을 결국 개인의 절대적, 독립적 능력 못지않게 상황이 주는 영향이 크다는 증거로 삼고 이를 보여주는 전시회를 기획한 것이다. 그래서 이 전시회에는 각 수상자들의 개인적 자료 뿐 아니라 그들이 살던 도시, 그들이 일하던 연구소와 학교 등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었다. 실로 통섭적 사고가 전시회에 적용된 예가 아닐 수 없다. 이 전시회를 보면 실로 ‘세상에 평지돌출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어떻게 보면 좀 무시무시하기도 하다. 어느 한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만으로 안 되는 까마득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글이라도 써서 우선 내 분야인 건축과 이 잡지의 분야인 영화 사이에 어떤 통섭적인 시도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 뿐이다.
2008-12-02 23: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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