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

인테리어와 의약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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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다니던 자동차가 고장났다. 정비센타에 겨우 끌고 가서 견적을 받아본다. 대부분 이런 경우 수리비는 예상을 훨씬 초과한다. 수리하거나 교체해야 하는 부품이 왜 이리 많은지! '말도 안 돼!'하다가도 이내 자기가 이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소양이 없는 것을 깨닫는다. 자동차 정비공과 자동차 수리에 대해 설전을 벌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결국 잘 고쳐달라고 부탁하며 나오면서도 기분은 썩 개운하지 않다. '처방만 내려주는 정비센타가 있다면 견적을 더 믿을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의약분업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사상 초유로 의사들이 집단으로 파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약사들이라고 해서 이를 환영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처방은 의사에게, 조제는 약사에게'라는 원칙이 고수되었다. 그래서 이전처럼 의사와 약사가 모두 처방도 하고 약도 파는 관행은 사라졌다. 병원에서 진료를 마치면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는 것이 새로운 패턴으로 자리잡았다.

의약분업이 실시된 과정에 대해서는 수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그 근본 정신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익의 상충(conflict of interest)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익의 상충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음악 콩쿨에 참가했는데 자기를 가르친 선생이 그 콩쿨의 심사위원으로 있는 경우 같은 것이다. 물론 선생이 자기 양심에 따라 판단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상황 자체는 이익의 상충이 일어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 선생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행동은 심사위원직을 맡지 않는 것이다. 의약분업의 경우 처방을 내리는 사람과 약을 파는 사람은 달라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기가 내린 처방에 의해약을 판다면 그것은 이익의 상충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것은 각자의 전문 분야를 그만큼 인정하고 보호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이것은 간단한 원리지만 이런 간단한 원리가 항상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의약분업에서처럼 아주 심각한 진통을 겪은 후에야 가능해지기도 한다.

같은 원리는 건축이나 인테리어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을 설계-시공 분리의 원칙이라고 하기도 한다. 설계를 처방에, 시공을 조제에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설계자와 시공자는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회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 분야에서는 이 문제가 오래 전부터 법률로서 규정되어 왔다. 그래서 아주 소규모 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축 공사에서는 설계자와 시공자가 같을 수 없다. 설계자가 시공 과정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감리업무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인테리어 분야는 이런 점에서 매우 독특한 모습을 종종 보인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관행은 모름지기 인테리어 회사라고 하면 설계와 시공을 겸하는 것이었다. 종종 '공사만 의뢰하면 설계는 무료'라는 영업전략이 동원되었고,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전체 작업의 가장 창조적인 부분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게다가 이것은자동차 정비센터나 의약분업 이전의 병원, 혹은 약국과 마찬가지로 이익의 상충을 가능케 하는 구조였다.

사실 이것은 인테리어 업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은 전반적으로 상황이 많이 변화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조명 디자이너는 대부분 조명기구 제작회사 소속이었고, 조경 디자이너는 역시 대부분 조경회사 소속이었다. 설계-시공 분리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고 설계의 독립성은 역시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회사에서 파는 것들로만 설계를 하거나, 공사비를 높이는 쪽으로 설계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작업을 의뢰하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다지 공정하지 않은 과정으로 보일 수 있었다. 작은 공사라 하더라도 그 금액을 정확히 산정한다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며, 그래서 소비자들은 종종 자동차 정비공장에 다녀온 것과 같은 기분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계-시공 분리의 원칙이 항상 효과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특히 작업의 규모가 작을 경우 설계자와 시공자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종종 비용과 시간의 비효율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이익의 상충을 제거함으로서 기대되는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을 경우, 원칙의 무리한 적용은 무의미하다. 또한 신축이 아닌 레노베이션이라면,설계자와 시공자가 처음부터 협력함으로서 비용이나 효과 면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기가 더 유리한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레노베이션의 경우 기존의 현장 상황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문제에 대해서 시공자가 더 효과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약분업이나 설계-시공 분리의 원칙이 갖는 기본정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일단 이 정신은 각각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설계자는 시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져야하지만, 자기가 직접 시공까지 넘보는 것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종종 '시공이 돈이 된다'하여 그렇게 하는 설계자들이 있다.) 반대로 시공자는 도면을 보고 설계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만, 자기가 직접 설계자가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문분야가 발달할수록 분야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제도가 요구된다. 건축이나 인테리어를 막론하고 좋은 작업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작업을 공정하고 투명한 과정에 의해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작 이외의 부분에서도 사회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갈수록 사회 구성원의 윤리가 강조되는 이 시대에 이것은 건축과 인테리어 분야가 뛰어 넘어야 하는 또 다른 도전이 될 것이다. 결국 의약분업이나 설계-시공 분리의 원칙은 윤리성과 전문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 위한 것임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