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S

 

 

 

집에 나를 맞추기

 

건축가가 하는 일

 

나를 집에 맞추지 않고 집에 나를 맞춘다니? 건축주 및 사용자의 삶의 요구(='software')에 맞는 집(=‘hardware')를 설계하는 것이 건축가의 일이라면, 위의 말은 건축가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건축가의 일이란 꼭 ’soft'한 것에 ‘hard'한 것을 맞춰주는 것일까? 오히려 ’hard'한 것에 맞는 ‘soft'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일 수는 없을까?

설계를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특히 건물에서 구체적인 기능이 요구되는 부분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하다. 예를 들어 병원 진료실의 경우 진료책상과 침대의 배치에 대해서 의사와 건축가 사이에는 수많은 토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의사들의 의견은 지금까지 자기가 해 왔던 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이전의 다른 병원에서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찾아서 연결시켜주는 것이 건축가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건축가 자신이 건축주라면 이 문제에 관한 흥미로운 상황이 만들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종로구 통의동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종로구 통의동 집은 30년이 넘은 양옥이다. 이 글을 쓰면서 호기심이 발동하여 다시 한번 각종 공부를 뒤적여 보았다. 건축물 관리대장에 의하면 이 집은 1971년 1월 16일에 완공되었다.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이 2003년 10월 말이므로 그럭저럭 33년 정도의 나이를 갖고 있는 셈이다. 1971년에는 공주의 무령왕릉이 발굴되었고, 4월에 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정희가 12월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방글라데시가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2학년생, 한창 뛰어놀 나이었으나, 1학기가 시작된 지 불과 2주 만에 급성신장염으로 장장 10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이 집이 지어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어린 나이에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겪었던 셈이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내 귀에는 몇 다리 걸러 아는 어른들 중 몇 분이 바로 전 해 오사카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를 다녀왔다는 꿈같은 소식도 들렸다.

 

이 집으로 이사 오게 된 사연은 그리 간단치 않으나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오래 전부터 회사와 집을 합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학생 시절부터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을 길바닥에 버려왔던 터였다. 학부 6년 , 대학원 2년을 마치고 계산을 해 보니 등하교 시간만 10달이었다. 미국에서 다녔던 직장은 아예 다른 도시에 있어서 서울과 천안 정도의 거리를 3년 반 동안 다녔다. 이러니 출퇴근에 신물이 나있지 않았으랴. 또 워낙 집에서 일을 많이 하는 습관이 있었기도 했다. 미국에서 일할 때 한국의 프로젝트 때문에 시차문제로 퇴근길에 집에 일거리를 가져오기 시작하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출퇴근을 통한 일터와 집 사이의 심리적 거리유지의 필요성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던 중 2000년 말부터 출판사인 열린책들의 사옥을 설계 및 감리 하느라 1년 반 정도 통의동을 들락거리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 동네에 서서히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결국 열린책들 사옥이 완공되고 3개월이 지난 후에 나는 통의동 주민이 되었다. 1989년 결혼과 더불어 강북을 떠난 지 13년 만에 나는 이렇게 다시 강북으로 돌아왔다. 모두들 강북을 떠나 강남으로 향하는 그 도도한 흐름에 역행한 셈이다. 건축사사무소 등록을 옮기기 위해 종로구청을 찾아 갔을 때 담당 직원은 ‘신기합니다’라고 인사를 대신했다.

 

‘제독집’

 

이 집을 찾으러 다닐 때의 에피소드. 부동산에서는 이 집을 ‘제독집’, 혹은 ‘잠수함집’이라고 불렀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제독집’은 이전 집주인이 해군제독이어서 그렇다는 것이었고, ‘잠수함집’은 건물 옥상에 원형 물탱크실이 있는데 이것이 잠수함의 함교처럼 생겨서 그렇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본디 시시콜콜한 것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습관이 있는지라 이 ‘제독’이라는 분이 누구인가 찾아보기 시작했다. 건축물 관리대장 및 등기부 등본에 나와 있는 이름은 불과 2명. 그 중 나중 사람은 당시 나와 흥정하고 있던 집주인이었으므로, 결국 먼저 이름이 장본인일 터였다. 해군 홈페이지에서 검색을 해 보니 빙고! 그 이름이 있었다. 인터넷 인물검색을 통해 이 분이 해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 집을 지어 이사했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나의 관심은 이 집을 설계한 분에게도 미쳤으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해군 시설장교출신인 한 후배로부터 같은 시기에 김중업 선생이 설계한 진해의 해군본부 건물과 유사한 디테일이 이 집에 많다고 들었다. 전후사정으로 보면 ‘혹시?’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집은 김중업 선생의 스타일은 아니며, 작품 연보에도 나와 있지 않다. 

 

신축, 레노베이션, 단순 입주?

 

이사를 앞두고 준비하다 보니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많은 분들이 내가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로 설계하여 집을 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레노베이션 프로젝트를 몇 개 한 것을 아는 분들은 ‘남의 집 고치더니 이제 자기 집 고치게 생겼네’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좀 맥 빠지게도 그냥 ‘단순 입주’였다.

 

무엇보다 새 집을 짓기는커녕, 레노베이션이라고 할 만한 공사를 할 돈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전 주인이 나름대로 몇 년 전 약간의 인테리어를 해 놓은 상태였다. 그 부산물로 오래된 집치고는 드물게 간단한 평면, 입면 등 도면이 따라왔다. 물론 내 마음에 드는 인테리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죄 뜯고 다시 하자니 돈이 만만치 않았다.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집의 어느 부분만 손을 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어디를 해 놓으면 다른 부분이 상대적으로 나빠 보이고, 그러다보면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마련이다. 결국 고민 끝에 최소한의 손만 보고 나머지는 우리가 집에 맞춰가며 살기로 했다. 그래서 건물이 아닌 우리 삶을 설계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쓰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실측도 하고 도면도 그려야하니 일반 설계일 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프로세스였다. 우리는 우리 삶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집과 사무실, 그리고 그 모호한 경계

 

주어진 프로그램은 이랬다. 우선 우리 집과 사무실이 한 지붕 내에 들어가야 했다. 어느 부분이 아래층으로 오느냐가 관건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는 사무실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택했다. 이 집에는 마당이 있었는데 집과 마당과 직접 면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엌도 아래층에 있었다. 2층의 경우 동쪽 끝 방에서는 쌈지공원 너머로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이 바라보인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온 날부터 이미 이 방을 내 것으로 찍어둔 터였다. 스탭들도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2층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일반적 재택근무자들과 달리 나는 아침에 계단을 걸어 ‘올라’ 출근하게 되었다.

 

또 다른 생각은 집과 사무실 사이에 뭔가 애매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었으면 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부분이 생기는 것을 개의치 말자는 생각이었다. 여기는 집, 여기는 사무실, 이렇게 딱딱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도대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영역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뭐든지 섞였을 때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2층에 있는 소위 ‘별실’이다. 지금도 이 공간이 사무실인지 우리 집인지 잘 모르겠다. 여기서 손님도 맞고 쉬기도 하고 영화도 보며, 심지어 철야근무를 할 때 우리 스탭들이 잠을 자기도 한다. 가끔 학생들을 불러 수업을 하는 곳도 여기다. 마침 작은 부엌이 딸리고 화장실도 있어서 그리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다. 손님들이 가끔 와서 자고 가기도 한다. (특히 부부싸움 후 대피처가 필요한 친구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 방에는 커다란 책장이 있어서 거기에는 내 책들이 꽂혀있고, 그 위에는 사무실에서 만든 이런저런 모형들이 올라가 있다. 그러니 온갖 것들이 섞여 있는 곳이며, 나는 그 모호함을 오래된 친구처럼 즐긴다. 구조상으로만 보면 우리 내외가 안방으로 사용했어야 할 곳이지만, 우리는 대신 아래층의 가장 작은 방을 택하고, 이곳을 우리 집에서 가장 열려있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또 다른 모호한 공간은 지하의 작업실이다. 원래 창고로 쓰던 곳인데 우리 스탭에게 단열, 전기, 환기 등 기본적인 설계를 해 보라고 던져주었다. 목수 아저씨와 둘이서 끙끙거리더니 꽤 쓸만한 방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 이 방은 우리 사무실의 모형실이면서 건물 유지관리를 위한 각종 연장, 물품 등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말이면 내가 손이 근질거릴 때마다 이것저것 만들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2층의 사무실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우리 스탭들은 이곳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나마 인터폰이 있어서 완전한 일탈은 아닌 셈이다. 

 

집으로 인한 생활의 변화

 

여기로 이사 오고 난 이후 우리의 생활은 크게 변했다. 그 변화의 상당 부분은 이 집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인데 ‘건축가’인 내가 ‘건축주’인 나와 우리 집사람에게 권한 것이기도 하다. 다행히 ‘건축주’는 별 불평 없이 오히려 이 변화를 호기심과 더불어 받아들였다.

  

일단 아침에 절대 늦잠을 잘 수가 없다. 우리가 거주하는 아래층에는 화장실이 하나 있는데 안방에서 여기를 가려면 거실을 지나 현관과 연결된 복도를 건너야 한다. 이 현관 및 복도는 사무실로 가는 동선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직원들 출근 시간 전까지 샤워며 몸단장을 마쳐야 한다. 또한 이 화장실을 가끔 손님들이 사용하기도 하므로 치약, 칫솔 등 개인적 욕실용품들을 사용 후에는 모두 장 속에 감추는 것 또한 우리가 잊지 않고 하는 일이다. 이것도 귀찮다면 귀찮은 일이지만 우리는 이제 숙달이 되어 별 생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아래층 거실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집사람(도대체 우리 둘 중 누가 ‘집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은 몇 년을 벼르다가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난 이후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동료들이 10시면 출근해서 거실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나는 몸이 아파도 그 시간 이전에 집에서 나와야 하며, 역시 그 사람들이 퇴근하는 시간 이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여러모로 이 집은 우리 두 사람에게 부지런해질 것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집의 구조상 내 손님과 집사람의 손님은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내 손님은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이층으로 올라간다. 나는 내 손님을 가급적 아래층의 도움 없이 혼자 맞으며, 따라서 커피, 다과, 심지어 술과 안주에 이르기까지 준비를 항상 해두고 있다. 집사람의 손님은 현관을 거쳐 바로 거실로 들어가는데 거실과 복도가 문으로 구분되어 있어 위에서는 아래층에 누가 왔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때때로 내손님과 집사람 손님, 그리고 우리 손님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경우도 있어 즐거운 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었다. 워낙 단독주택이라는 것이 이것저것 주인의 손길을 많이 필요로 한다. 졸지에 마당이 생기고 덤으로 전 주인이 기르던 연못과 잉어까지 넘겨받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다. 주말 오후에는 농부처럼 볕에 그을리며 일해야 하는 상황도 곧잘 벌어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을 많이 배우고 있다. 그것은 건물관리에 대한 것이다. 결혼 이후 계속 아파트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점차로 단독주택을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살면서 이런 것들을 싫건 좋건 배우게 되기 때문에 설계할 때도 어떻게 하면 관리의 부담을 줄일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방수, 냉난방, 전기, 상하수도, 전화, 통신, 단열, 폐기물 처리, 수목관리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을 잘했다고 꼭 좋은 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중 하나라도 잘못되면 마치 오래된 충치처럼 집주인의 일상생활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 설계자가 잘 알고 미리 챙기면 단독주택도 아파트 못지않게 관리에 들어가는 노력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집이 나로 하여금 건축설계의 현실적인 측면에 더 눈을 뜨게 하고 있는 셈이다.

 

재택근무의 부작용

 

이 집을 찾아 온 사람들 중 몇몇은 이 동네의 유장하고 한갓진 분위기를 좋아하면서도 일과 관련된 전투력이 혹시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걱정을 했다. 한창 일할 나이의 내가 ‘동네 분위기에 취하여’ 혹시 게을러질까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말이라 나는 가슴에 깊이 새겨두었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났다. 도대체 방해되는 것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마음먹은 대로 일을 할 수 있었고, 매일 같이 새벽 2시고 3시고 신나게 책상머리에 앉아 지내기 시작했다. 우리 스탭들도 아예 집에 안 가는 날이 늘어났다. 결국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건강에 이상을 느꼈다. 부랴부랴 달려간 병원에서는 과로, 스트레스, 운동부족으로 인한 갖가지 음산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것이 재택근무 신드롬이며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라는 충고를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이면 일단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가 다시 ‘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밤이면 역시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집’으로 ‘퇴근’을 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아예 작정을 하고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운동 삼아 걸었는데, 나중에는 걷는데 재미가 들려서 결국 사대문안 답사가 되었다. 나는 지난 여름, 지도와 항공사진을 들고 다니며 서울 성벽을 여러 번에 걸쳐 완전히 답사했고, 인왕산은 내가 가장 즐겨 찾는 산이 되었다. 많이 걷는 날은 통의동 우리집에서 시작하여 안국동-이화동-대학로-낙산공원-신당동-장충동을 거쳐 남산을 완전히 종주하여 다시 집에 돌아오는 장장 15킬로의 파워 워킹을 다녀온 적도 있다. 집이 시내에 있어서 이런 것도 가능하니, 결국 집으로 생긴 문제를 집으로 푸는 셈이었다. 조금씩 피워오던 담배도 완전히 끊어버렸다.

 

내 집, 우리 집, 모두의 집

 

여기로 이사 오면서 한 가지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정기적으로 집과 사무실을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다. 여기는 바로 서울 시내 한 복판이다. 지난 월드컵 때 우리는 집에 앉아서 광화문의 응원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교보는 걸어서 10분, 세종문화회관은 그보다 더 가깝다. 그만큼 사람이 찾아오기 쉽고 우리도 돌아다니기 편하다. 그래서 이사 이후 어느 정도 물건들도 자리가 잡히고 우리도 정신적인 여유를 되찾았을 무렵, 우리는 영추문의 이름을 딴 영추포럼이라는 행사를 매달 열기 시작했다.

 

영추포럼은 아주 작고 유연한 프로그램이다. 보통 15명에서 많으면 30명이 넘는 손님들이 참석한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나라와 일본의 건축가와 교수, 그래픽 디자이너 등이 이야기를 해 주었고 작은 음악회를 연 적도 있었다. 딱히 할 것이 없었을 때는 그냥 모여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우리는 오로지 홈페이지(www.djharch.com)와 이메일로 행사를 홍보하며, 때때로 일간지에 행사 안내가 나가기도 한다. 준비와 진행은 나와 우리 직원들의 몫이다. 엄연히 우리 사무실이 주최하고 운영하는 공식적인 행사이며,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단체가 후원하는 문화행사’라는 별명도 들었다. 그냥 하면 되지 굳이 이름이 왜 필요하냐고 하시는 분도 있었으나, 그것은 이런 행사를 직접 해보지 않아서 하는 소리다. 만사에는 어느 정도의 형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행사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우리의 개인적 공간이고 가끔 전혀 낮선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기도 하기 때문에 처음에 우리는 약간의 걱정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으며 한 달에 한번 이 행사가 벌어지는 날은 마치 이곳이 작은 공공장소가 되는 것 같아 오히려 기분이 좋다.

 

목련원

 

아직까지 대문에는 사무실 간판이 없다. 건축가의 사무실이라는 것이 워낙 사람들이 알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존재를 너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의외로 이 동네에는 겉으로는 주택인데 알고 보면 사무실인 건물들이 많다.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두 건물도 헥사콤과 형설출판사라는 회사들이다. 이 두 회사도 거의 간판이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실로 묘한 가면을 쓰고 있는 동네가 아닐 수 없다.

주변에서는 집에 이름을 붙일 것을 권했다. 그런데 나는 무슨 ‘...재’나 ‘...당’, ‘...헌’ 같이 요즘 유행하는 이름은 이 집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침 이 집 마당에는 목련이 두 그루 있는데, 하나는 백목련, 또 다른 하나는 적목련이다. 처음 이 동네를 들락거리기 시작했을 때 이 집 담장 너머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모습에 한 동안 길에 멀거니 서서 바라본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 교화가 목련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맑고 그윽한 자태와 향기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기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이 집을 ‘목련원(木蓮園)’, 영어로는 ‘Magnolia Court'라고 이름 지었다. 정작 이름을 짓고도 내 자신 자주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이 이름으로 된 우편물이 날아오면 그 느낌이 새롭다. 나는 정말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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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설계할 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1. ㄷ자, ㅁ자 등 마당과 집이 서로를 얼싸안는 배치를 한다.

2. 아빠에게 방을 만들어준다. 남자 마음은 남자가 안다.

3. 우리나라에는 소위 막부엌이 필요하다.

4. 과도한 인테리어와 첨단 장비는 정신 건강을 해친다.

5. 옆집에 근사한 나무가 있으면 그 경치를 빌려온다.

6. 조경업자에게 조경설계를 맡기지 않는다.

7. 한국형 화장실 및 욕실을 개발하고 싶다.

8. 방 하나는 벽에 빨간색을 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