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프로젝트: 축복인가 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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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수많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서로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간다. 상황에 따라 그 생각이나 행동이 어떤 일정한 흐름을 갖게 되더라도, 그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사회적인 의미나 가치를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다양성이야말로 한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목소리들과 사회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의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우리가 건축과 도시 분야의 공공 프로젝트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의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여 제시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공공성이란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지침의 차원을 넘어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 존재하는 어떤 정신이다.

 

개별적인 건축주의 존재를 전제로 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가치의 관점에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건축의 특성이면서 동시에 한계다. 건축주는 당연히 자신의 배타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며, 이것은 종종 사회적 가치와 충돌한다. 물론 최소한의 장치로서 각종 제반 법규 및 절차 등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건물이나 사람에게 있어서 준법은 바람직한 가치의 달성을 위한 필요 조건이지, 충분 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건축법을 잘 따랐다고 해서 당장 좋은 건축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개별 건축가들의 사명감과 능력은 건축의 사회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으로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미약한 수단인가!

 

이것은 결국 중대한 사회적 과제의 달성이 개인의 극히 예외적이며, 경우에 따라 영웅적인 노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수많은 미담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되, 유감스럽게도 하나의 문제해결 방식으로 별로 보편적인 효과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대치할 만한 다른 제도화된 방법이나 절차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공공 프로젝트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부 및 산하단체들이 건축주가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일반 건축물들에 비해 건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떠한 차이를 확보하느냐가 바로 관건이 된다. 다시 말해서 공공 프로젝트의 성패는 위에서 제시된 공공성의 과제를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위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썩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과정이나 결과에 있어서 일반 건축물에 비해 별 나을 것도 없거나, 오히려 더 퇴보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많은 공공 프로젝트에서 공공성의 의미는 왜곡되어졌다. 그것은 '권력'이나 '권위'라는 이름으로 재해석되어 그것을 강화하는데 사용될 뿐이었다. 건축은 그 속성상 이런 일에 아주 능하며, 우리는 그만큼 민감하고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대지 선정, 토지 이용 계획, 동선, 형태 등 건축 설계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집요하게 구현된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공공 프로젝트는 산 속에 모셔져 있거나 도시에 있다고 해도 대중의 접근이 결코 쉽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십중팔구 주위에 담을 두르고 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소위 '군부대식 배치'를 하고 있다. 단독주택에서 대형 건물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발견되는 이런 식의 건물 배치는 한국의 도시와 건축을 불행하게 만드는 심각한 병폐의 하나이다. 권위적인 외관에 우람한 석조의 분위기를 유달리 선호하는 경향도 보인다. 오랜 투쟁을 거쳐 민주화를 이루어낸 시민들도 왠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짝이 없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린 후 약간 걸어서 길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 음악당, 미술관, 관공서 등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이런 배려는 건물을 통한 사업적인 성공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민간 건축주들의 건물에서 더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공공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언젠가는 던져져야 할 뼈아픈 질문이 있다. 그것은 과연 건축가들이 어떤 태도로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경우에 따라서는 일단 프로젝트 참여 여부 자체가 자신의 사회적, 건축적 신념을 반영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 불필요하거나 아니면 옳지 않은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아무리 건축적인 성과가 뛰어나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물론 여기에 대한 건축가들의 입장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건축가는 전문가이며,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듯이 건축주의 요구에 대해 성실하게 자기의 능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추세는 이런 문제에 매우 신경을 쓰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추진 중에 있는 박정희 기념관의 경우, 몇몇 건축가가 정치적 소신을 이유로 참여를 거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건축가들은 그들이 건축행위의 어떤 부분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는 듯 하다. 반대로 참여를 결정한 건축가들이라면 일단 이러한 프로젝트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할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똑같이 가치 있는 것이다.  참여했건 참여 안 했건 그들은 모두 행동을 통한 자기 주장을 한 것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스스로를 설계 전문가로만 파악할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에 따라 프로젝트에 대한 입장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전문가라는 의미를 매우 편협하게 해석하면 '능력만 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태도가 된다. 이런 경우 자기의 개인적인 신념, 가치 같은 것들은 상당히 유보된다. 그렇지 않은 입장이라면 의당 어떤 프로젝트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은 건축사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우리는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유럽에서 활동하던 시절, 유명한 공산당원 로자 룩셈부르그와 카를 리프크네흐트의 기념비를 설계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전력은 그가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그를 탄압하려 했던 나치 당에게 아주 유리한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이렇게 정치적인 이유로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훗날 소위 자본주의의 성당으로 일컬어지는 시그램 빌딩을 설계하게 된다. 혹자는 이러한 그의 경력을 두고 '미스는 악마가 설계를 의뢰했어도 했을 것'이라고 비판하였으나, 정작 그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해 별 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형적인 전문가로서의 건축가의 태도를 견지한 나머지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대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작업 대상의 이념적, 도덕적 속성은 자기의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열렬한 사회주의자면서도 증권거래소 건물을 설계했던 베를라헤, 평생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고 또 이를 열심히 부인했던 르 꼬르뷔지에, 건축사에 이런 예들은 무수히 많다. 반대로 권력에 공개적으로 밀착 내지는 공감하여 그 권력의 영속과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건축가들도 많다. 히틀러의 건축가였던 알버트 슈페어가 그 중 하나이며, 파시스트 당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던 테라니 역시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유난히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심하여 그 과정에서 많은 비극을 겪은 우리나라에서 건축가라고 해서 결코 이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가들이 진심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한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당선이 아닌 자기의 건축적, 사회적 신념을 도면과 모형으로 발언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현상설계에 참여하는 건축가들은 그만큼 드물다. 그래서 소위 '현상성'이라는 전대미문의 괴개념이 탄생하였고, 그것은 거의 모든 현상설계 당선안을 비슷비슷한 것으로 만드는 신기한 결과를 낳았다. 이제 당선안을 보고 어느 건축가, 어느 사무실의 작품인지 추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추구하는 가치가 별로 다르지 않거나, 우리 사회가 아직도 그만큼 경직되고 획일화되어 있거나, 아니면 건축가들이 진심으로 자기가 믿는 바를 실천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공공 프로젝트들은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의견교환이 유보, 아니 마비된 채 진행된다. 그 결과는 거의 전적으로 보수적이며 퇴행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것은 결국 건축주인 권력집단의 요구에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공공 프로젝트들은 다양한 가치의 수용과 조절이라는 공공성의 과제는 무시된 채로, 일방적인 건축주의 의견 수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 건축물과 비교하여 하나도 나을 것이 없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면 지금까지의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 치고 이런저런 심각한 논란에 휩싸이지 않은 것은 없었다. 독립 기념관, 예술의 전당, 전쟁 기념관, 국립 박물관 그 어느 것을 보아도 합의에 대한 독단의, 개방과 진보에 대한 보수의, 새로움에 대한 복고의 우세로 점철된 것들이었다. 이것은 너무나 일관성이 있는 흐름이어서 해석의 노력 자체를 무의미하게 한다. 최근의 화제였던 천년의 문까지 여기 더하면, 그야말로 우리의 공공 프로젝트들은 건축가들에게 있어서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가 없다. 적임자를 선정하고 그로 하여금 자기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능조차 제대로 동작이 안 되는 사회라는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와중에서도 서울시청 어린이집 같이 규모는 작지만 건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시사하는 것이 많은 공공 프로젝트도 있었음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건축가가 가질 수 있는 큰 꿈 중의 하나는 정당하고 투명한 과정을 통해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통해 열린 사회, 자유로운 사회, 민주적인 사회의 구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건축가로서의 보람 이전에 창의적 능력을 지닌 시민으로서의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가치와 신념은 건축을 낳게 하는 기본적인 배경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건축에 의하여 완성을 보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회와 건축간에는 결코 일반적이라고 볼 수 없는 역동적인 상호관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공공 프로젝트야말로 이러한 상호관계를 통해 한 사회가 공식적으로 그 발전과 변화를 확인하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사회는 이를 통해 매번 거듭난다. 이것은 축복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에게 진실했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