私에서 公만들기 (Creating the Public within the Priv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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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어떤 건축과 학생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건축 공부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막상 건축가가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몇 가지 있다고 하며 나의 의견을 구했다. 그 학생의 질문은, '건축가들은 대부분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되는데, 결국 부자들 뒷바라지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건축에 대해 회의가 드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냐'는 취지였다. 당시 내가 올렸던 의견을 여기 소개한다:

 

일단 개인이건 단체건 간에 돈이 있어야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어느 정도의 돈이 있으면 구할 수 있습니다. 오디오, 가구, 심지어 웬만한 고급 자동차도 비싸봐야 몇 천만원입니다. 하지만 건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토지비용과 시공비를 다 합치면 작은 건물도 쉽게 몇 억을 넘어섭니다. 그러니 건축주는 다 돈 많은 사람들입니다. 인구의 과연 몇 퍼센트가 건축주일까요? 아마 1%도 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건물이 지어지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그것이 상가이건, 박물관이건, 사무실이건, 그 숫자는 실로 엄청납니다. 건축주는 온 국민의 1%도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건물 이용자는 사실상 우리 모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건축을 공공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건축에서 이 공공성을 빼고 나면, 사회적 보람이라는 측면에서 별로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 공공성을 보장하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우선 건축가에 대한 자격증(건축사) 제도이며, 또 다른 하나가 까다롭기 짝이 없는 건축관련법규입니다. 물론 저 자신도 창작의 자유로움을 법에 의해 제한 받는 상황에 대해 짜증이 날 때가 없지 않으나, 만약 이것이 없다면 도시는 정말 가관이 될 것입니다. 누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할 것이며, 도시 미관을 위한 건축선 후퇴를 하겠습니까? 물론 사회에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워낙 많은 돈이 들어가는 문제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의도에만 맡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창작 중에 건축만이 유일하게 관련 법규 검토로서 작업이 시작되는 이유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건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이렇게 공공성을 갖게 됩니다. 회사의 사옥이라면 그 건물에 입주하거나 출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연수원을 잘 지으면 그 혜택이 거기서 연수를 받는 임직원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건축주 자기 자신이나 그 가족들만이 사용하기 위해서 짓는 건물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 주택 같은 것 말입니다. 사실상 건축의 공공성이란 이슈는 특히 단독주택에 대해 적용하기가 난감합니다. 저도 답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도시미관적 차원에서의 공공성, 그리고 순수 예술적 가치 정도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무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사실 단독주택이라고 해도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습니다. 이웃 건물을 위한 배려 같은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주차문제, 배치문제 등에서도 일단 공공성을 의식한 결과와 그렇지 않은 결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공공성이라는 것은 어떤 정해진 형식이라기 보다, 정신 같은 것입니다.

 

단독주택이 야기하는 문제는 사실상 더 깊숙이 들어가면 결국 사유재산, 나아가서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이전에 네덜란드에서 좌파 정부가 집권했을 때정부 차원의 사회주택은 모두 임대용만 지었다고 합니다. 분양하는 주택은 한 채도 짓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사람이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면 보수안정을 희구하게 되고, 사회의 진보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정부건 민간이건 분양하는 주택만 주로 지어온 것과는 아주 다른 생각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하는 건축가들은 딜레마가 많습니다. 아무리 법적인 장치가 있다고 해도, 법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기준만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빠져나가는 것으로 해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더구나 법에도 조항이 없고 별다른 권장혜택도 없는 것을 공공성을 위해서 하자고 하면, 그 요청을 들어줄 건축주는 많지 않습니다. ('그게 좋으면 당신이나 돈 벌어서 해', 이럴 수도 있겠습니다.) 렘 쿨하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와 건축가의 관계는 파도와 파도타기 선수와의 관계와같다'는 것입니다. 파도타기 선수는 파도를 만들어낼 능력은 없고, 다만 이것을 이용하는 재주만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파도에 대항하면 근본적으로 파도타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설득력을 갖춰야 합니다. 법규 같은 것도 그 정신과 실체를 정확히 이해해서 가급적 이를 통해 공공성을 확보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제 경험으로 봐도 자기 건물을 통해 사회적으로 좋은 일 하려는 분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사실 공공성이 건축주의 이익과 꼭 상반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장애인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건물에는 장애인 손님이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제안하고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며, 이것은 건축가 자신이 공공성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건축의 가장 소중한 무기인 공공성은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그다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 건축가는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것은 아주 중요하며 보람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한번 해 볼만한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피아니스트 백건우에 대한 어떤 비평가의 평으로 답을 마무리합니다:

 

'그는 관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뮤즈의 여신을 위해 연주한다.'  

 

'관객'을 건축주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뮤즈의 여신'을 공공성으로 대체하면 말하고자 했던 바의 대강이 드러난다. 그 학생이 이 글을 읽고 고민이 해결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오히려 질문에 대한 답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더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스스로를 일깨우는 의미에서, 이 글의 제목인 'Creating the Public within the Private'이란 문구를 만들어 스크린 세이버로 띄운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다.

 

문제는 이 공공성의 실체라는 것이 워낙 모호하다는 것에 있다. 공공성의 수혜자를 일반 시민이라고 보면, 그 수는 워낙 많으며 속성 또한 무한히 다양하다. 그들은 각자 다양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공공성이란 이슈도 각자의 입장에서 판단한다. 예를 들어 어떤 건축가가 아름다운 가로에 면한 건물을 설계한다고 해 보자. 가로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보행자 중심의 설계를 한다는 '공공성'을 위해 건축가는 주차장 출입구를 건물의 후면 도로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평소 주차난이 있던 후면 도로변 주민들은 오히려 그 건축가가 자기들의 '공공성'을 침해하였다고 항의하고 민원을 제기하였다. 건축가가 염두에 두었던 또 다른 공공성에 대해 이들은 자기들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문제는 이런 경우 건축가가 생각하는 공공성이란 적극적인 후원자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쌍방이 모두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경우 더욱 그렇다. 관청도 이런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건축가들은 종종 도시환경과 관련, 공공성 이슈의 최전방이면서 동시에 최종 방어선이다. 건축가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것은 결국 별다른 무기 없이 의욕만 갖고 전쟁에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뮤즈의 여신'을 위해 노력하는 건축가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건축주가 관청인 공공건물들에서 이런 노력은 더욱 두드러진다. 개인 건축주는 오히려 개인적 신념이나 가치관 등에 따라 사회를 향한 놀랍도록 훌륭한 태도를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공공건축을 둘러싼 상황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저예산, 졸속, 행정편위주의, 관료주의, 권위주의, 창의력의 빈곤 등, 좋은 건축을 할 이유보다 그렇지 않을 이유를 더 많이 제공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많은 건축가들이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소개된 공공 프로젝트인 선유도 공원의 경우를 보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건축가는 설계자가 감리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제도적 모순에 직면하였다. 업체의 선정이 입찰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에서 프로젝트의 품질 문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 건축가는 일종의 자원봉사를 함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했으며, 결과적으로 고품질의 공공건축물이 탄생하게 되었다. 해당관청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건축가가 절대로 '싼값에' 이 프로젝트를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는 프로젝트 수행을 위한 제반 경비 및 창의적 노력의 댓가 등 아주 엄청난 금액을 공익을 위해 '기부'한 것이다. 제대로 된 관청이라면 적어도 이 기증된 부분을 금액으로 구체적으로 환산하여, 최소한 세금혜택 등을 포함한 행정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창의적인 설계자이며 동시에 관대한 기부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할 필요도 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설계자가 기증을 하지 않아도 될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충분한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는 '사를 위해 공을 희생한' 지긋지긋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만큼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한다'는 생각에는 감동적인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상황 자체는 이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오히려 공과 사가 서로의 목표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공의 적'이 되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순교자가 될 이유도 없다. 공과 사를 더 이상 대립의 관계로만 보지 않는 시각에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