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함성, 보이지 않는 간판
................................................................................................................................................................................................................................................
놀이 중에 이런 것이 있다. 4명씩 두 편이 서로 마주 보고 앉는다. 그 중 한 편이 네 음절로 된 단어를 동시에 한 음절씩 말한다. 예를 들어 '동-방-불-패'하는 식이다. 다른 편이 이를 잘 듣고 어떤 단어인지 알아맞히는 것이다. 쉬울 것 같지만 해 보면 그렇지 않다. 일부러 살짝 이상하게 발음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더욱 어려워진다. 몇 번 하다보면 어떤 단어든지 비슷하게 들린다는데 이 놀이의 묘미가 있다. 각자가 크게 외칠수록 더 알아들을 수 없는 것도 재미있다. 그래서 몇 번 하다보면 그야말로 고함 지르기가 된다.
간판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시각 환경이 처해있는 상황이 바로 이렇다. 서로 나를 보아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으나, 정작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진단이나 처방 또한 여러 가지다. 우선 국민의 전반적 미적 감각이 낮아서 오는 문제이므로, 장기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소양이 높아져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관청의입장은 어떤 것이냐 하면, 이런저런 규정을 마련해서 관리를 하고 잘 된 간판에 대해서는 포상하고 장려하는 것이다. 심지어 빨간색 간판은 허용하지 않는 지역도 있다.
그런데 어쩌면 해답은 좀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이것을 시스템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각종 창구 앞에서의 줄서기에 관한 문제를 보자. 여기에 대해서도 국민의 질서의식에 대한 개탄으로부터 시작하여 별별 이야기가 다 있었다. 그러나 결국 대기표 라는 간단한 방법에 의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결이 되었다. 한 줄 서기 운동도 계몽의 노력 못지 않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바닥에 그려진 신발 표지나 미리 쳐 놓은 줄이 아닌가. 결국 창의성이 도덕이나 시민의식 보다 더 효과적인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 간판의 문제를 보자면 이렇다. 일단 이것은 주소 시스템의 불완전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주소만 갖고 건물을 찾아 갈 수 없으므로 건물 입주자들모두가 간판을 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주소는 지역의 개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로 길을 따라 주소를 붙이는 방식이 보급되고 있다. '무슨 동, 몇 번지'에서 '무슨 길 몇 번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건물을 찾기가 훨씬 쉬워진다. 장기적으로 이런 시스템이 정착되면 간판의 필요성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또 다른 입장은 자본의 규모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시풍경은 몇몇 대형건물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소자본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다. 간판이 많은 것은 그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히려 자본의 집중이 고도로 이루어진 서구 도시들에 비해 거리가 아기자기하고 생활이 그만큼 편리하기도 하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런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그래서 오히려 특이한 도시경관을 연출할 수 있는 소재가 될 수도 있다.
업종별로 간판의 필요성이 다르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예를 들어 같은 변호사라 하더라도 소위 대형 로 펌의 경우 건물 바깥에 커다란 간판을 내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들은 찾는 고객이란 대부분 사전 연락을 하고 오게 마련이며, 또 나름대로 상대방의 품위에 대한 기대가 있다. 따라서 '나 여기 있소!'라고 아우성을 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개인 변호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건물에는 간판이 난무하며, 심지어 유리창에 글씨를 붙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변호사들은 대부분 이혼 등 작은 민사소송 등의 업무가 주종목인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니까 길을 걷던 고객이 두리번거리다가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간판의 필요성이 거의 없는 업종도 있는데, 이런 경우 아주 제한적인 고객을 상대하거나, 아예 고객이 영업장에 찾아오지 않는 경우이다. 따라서 사전 예약제의 관행이 널리 정착되는 것만으로도 간판의 필요성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적어도 양적으로 줄어들지는 않아도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생기는 것이다.
결국 간판의 문제는 우리사회의 이런저런 모습들과 긴밀하게 얽혀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일수록 해결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빠른 해결방법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제도적 장치를 통하지 않고도 비교적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우선 건물을 설계할 때부터 간판에 대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건물의 모양이나 입지 등을 고려하면 간판을 붙일 위치는 비교적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디자인적 배려를 미리 하는 것이다. 전면유리로 된 건물들이 종종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도대체 간판을 붙일 위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유리면에 그대로 간판이 붙기도 하는데, 대부분 이런 경우 조화로운 결과를 얻기가 어렵다. 가장 심한 경우는 글씨를 그대로 유리창에 붙이는 것인데, 창을 열고 닫는 것에 따라 글씨의 배열이 바뀌는 등 아주 우스운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결국 이 문제의 해결은 건물을 설계하는 건축가들로부터 시작된다.
또 다른 방법은 유리창 안에 간판을 다는 것이다. 흔치 않은 방법이지만 의외로 효과가 있다. 특히 많은 입주자가 있는 건물이거나 혹은 경관적으로 중요하여 간판을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는 지역의 경우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하와이 와이키키 해안의 중심가로에 이런 간판이 많다. 건물의 외관을 심각하게 손상하지 않으면서 개개 입주자들의 간판에 대한 요구가 조화롭게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다.
간판의 묘미 중 하나는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을 찾는 것이다. 어차피 개개 간판의 디자인이나 색상은 다를 수 있다. 물론 파리처럼 간판의 색상까지 규제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어느 정도의 통일성만 주어도 시각적 혼란은 크게 줄어든다. 예를 들어 각각의 점포에 일정 규격의 간판틀을 만들어주고 그 내부에서는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미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건물 소유 및 관리자의 마음가짐이다. 특히 임대 건물의 경우 더욱 그렇다. 자세한 규정을 미리 만들어놓고 이를 임대계약의 일부로 만들 필요가 있다. 어느 한 입주자라도 이 원칙을 깨면 나머지 입주자들이 금방 그 뒤를 따르기 때문에 이 규정은 강력하면서도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더 자주 들린다. 우리가 굳이 제복을 입지 않고 살아가듯이, 간판의 문제도 획일적인 규제가 능사는 아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간판이 조화로운 나라는 이미 그 자체로 사회적 성숙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명심할 것은 우리보다 소득이 낮고 소위 후진적이라 간주되는 나라들에서조차도 간판으로 인한 문제가 우리처럼 심각한 경우는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혼란한 환경은 우리의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그래서 환경보호가 결국 인간보호로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으며 환경은 곧 인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