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전쟁의 기억과 상처 The Korean War Still Goes On in Our Daily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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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단위지만, 한국 사회의 경우 그것은 실재하는 거의 유일한 공동체가 아닌가 한다. 특히 식민지와 전쟁, 정통성을 결여한 군부 독재 등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삶은 광장으로 나오기보다는 안으로 움츠러드는 경향이 강하였다......" (임지현,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 읽기' 중에서)1)
버려진 광장, 요새화된 밀실2)
어린 시절 살던 동네는 강북의 전형적인 주택지였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골목길을 따라 죽 늘어서 있었다. 골목길은 재미있는 곳이었다. 동네에 따로 놀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동네 뒷산 아니면 골목길에서 전쟁 놀이나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다. 목총을 메고 심지어 망토까지 두르고 동네를 몰려다니며 '탕탕'거리며 서로 죽고 죽이는 시늉을 하던 우리들을 어른들은 그냥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동네의 모든 집들은 높은 담을 두르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집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담이 높기도 했거니와 대문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길은 좁고 담은 높으니 골목 안은 항상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그 담들이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끝이 뾰족한 쇠꼬챙이가 위에 박혀있거나 아예 철조망을 두른 집들도 많았다. 돈이 없는 집에서는 시멘트를 바르고 그 위에 깨진 유리병 조각들을 꽂아 놓았다.
그래도 집안의 마당에는 꽃밭이나 우물 같은 것이 있었다. 아침 일찍 사람들은 마당을 쓸었다. 그리곤 대문을 열고 쓰레기를 골목길에 버렸다. 연탄재는 물론이고 못 쓰는 가구 같은 것들이 골목길 어딘가에 항상 있었다. 수챗구멍을 통해 마당에서 빨래한 물이 길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중무장된 담이 집과 그 안의 소중한 가족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보호였다. 골목길은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버려진 광장, 우리 도시들의 디아스포라였다.
광장혐오증에 걸린 도시
위의 내용은 1970년대 어느 주택가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 우리의 도시들의 모습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 땅에 일단 높은 담을 두르고, 그 한가운데 건물을 위치시키는 문명적인 습관은 그야말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적용된다. 우리의 관공서, 대기업 사옥, 학교 등은 모두 이러한 단독주택형 배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종종 수위실이 첨가됨으로서 건물의 철통같은 안보는 완성된다. 적어도 토지 이용의 방식에 있어서 오든 건물은 군부대와 동일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담 너머의 세상으로부터 나를 격리, 보호하자! 그것이 바탕에 깔린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한단 말인가?3)
권력에 의해 왜곡된 공공성에 대해 시민들은 공공성의 침해로 대항했다. 골목길? 그것은 더 나빠졌다! 이제 자동차는 차도와 인도의 구별 없이 도시의 숨겨진 1인치를 모두 덮고 있다. 도시 미관 증진과 인도폭 확보가 명분이었던 미관지구의 건축선 후퇴 조항은 결국 건물 전면 주차장만 만든 꼴이 되고 말았다. 도시의 공공영역은 이렇게 짓밟혀지고 공격당하며, 내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높은 담 아니면 내장을 쏟아 놓은 듯 마구 거리로 침범해 들어오는 물건, 혹은 간판뿐이니 길을 걷는 재미라는 것은 아예 없어졌다.
워낙 우리에게는 광장의 문화가 없기도 했다. '서양은 광장, 우리는 길'이라고 문화적 차이를 들어 변명하기에는 우리 도시들의 물리적 환경이,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거나 이용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워낙 참담한 수준에 있다. 이조 500년의 수도 한양, 기형적으로 큰 면적을 차지했던 5대 궁궐과 관공서 건물을 빼고 나면 사실 그 도시엔 별로 남는 것이 없었다. 시장이나 도시 밖의 공터를 제외하고 사람들이 모일만한 곳이 원래부터 없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독립협회가 주최했던 만민공동회로부터 시작하여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공공장소에서의 시민의 모임은 온갖 이유를 들어 저지 당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광장이라고는 주로 관제집회가 열렸던 5. 16광장 정도였다.4) 그나마 이것마저 문민정부에 들어 성격이 불분명한 공원으로 바뀌고 말았다.
아직도 진행중인 전쟁
한국전쟁이 기술적인 측면에서 아직 종전이 아닌 휴전의 상태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이것은 단순히 '전투'가 멈추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쟁심리는 계속되고 있으며 서해교전의 경우에서처럼 언제 어떤 식으로 돌출될 지 모른다. 그래서 전쟁의 기억과 상처는 아직도 완료형이 아닌 현재형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군부 독재는 한국의 현대사를 규정하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이들을 서로 분리되지 않은 연속적인 흐름으로 이해하고, 그 연장선상에 오늘의 상황을 배치시킴으로서 현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한국전쟁이란 문제를 거론하면서 필연적으로 그 전후의 상황을 연결시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위의 내용에서처럼 오늘날 우리의 도시들에서 발견되는 가장 심층적인 문제는 바로 공공성의 상실, 혹은 왜곡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건축과 도시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우리 역사와 사회의 문제이다.
전제군주가 다스렸던 조선 500년간이야 그렇다 치자. 일제 식민지 시대도 그 특수성을 인정하기로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그 이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의 상황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들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은 신생국 대한민국이 최초로 겪은 '국가존망의 위기'였다. 따라서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사태 처리 방식은 그 이후 나라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공공성은 처음부터 무시되고 말았다. 사회적 공공성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권력이 국민들을 보호하고 그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개전 초기부터 이 절대 명제를 져버렸다. 지금도 나이 든 서울 시민들이 잊지 못하는 사건, 즉 한강다리 폭파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서울 사수를 약속하는 노대통령의 방송이 나갈 무렵, 그와 그의 정부는 이미 남쪽 지방으로 피난을 간 이후였다. 그리고 아직도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이 서울에 있고 많은 병력이 강을 건너기도 전에 한강의 유일한 다리가 폭파되었다. 폭파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다리 위에 있었다.5) 이 사건은 국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정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이것은 이후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 역사적으로 반복되었고, 역시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한강과 강남 개발의 신화
도시가 사람이라면 자신의 출생과 성장 과정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이라면 임진왜란 당시 수평선을 가득 메운 적선의 모습을 희미하게 떠올릴 것이고, 그 후 몇 백년이 지나 엉뚱하게도 침략자인 일본에 의해 본격적으로 도시가 성장하게 되는 과정을 다소 난처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한국전쟁 당시 끝까지 점령당하지 않고 정부와 수많은 피난민들을 지켜낸 자부심 또한 있을 것이다. 서울이라면 어떨까. 물론 여러 가지 멋진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서울은 전쟁, 그리고 그 상처와 관련된 지긋지긋한 기억을 많이 갖고 있다. 용산의 미군 기지처럼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상처들이 마치 몸에 두른 족쇄와 같이 정상적인 성장을 저해하고 있음을 호소하기도 할 것이다.6) 그러면서 서울은 한강에 대한 미묘한 입장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한강은 서울의 입지 선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마포나루를 통해 상류지역 및 서해안을 연결하는 수상교통이 발전할 수 있었고, 이것은 조운의 원활한 운용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아 한강은 서울, 당시 한양의 중요한 도시적 부분은 아니었다. 한양성벽은 남산능선을 따라 돌면서 그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따라서 한강이 오늘날과 같이 서울이란 도시의 한 가운데 위치한 것은 정말 오래되지 않는다. 그것은 강남의 폭발적인 개발이 가져온 결과였다.
한강은 침략하는 적을 저지하는 천연의 방어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왜구처럼 적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경우이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개화기 당시 몇 번의 양요를 겪으며 서양 배들이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당시 서울이나 평양 사람들은 강에 대한 묘한 느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강이 우리의 발목을 묶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한국전쟁 당시의 한강다리 폭파 사건은 이러한 불안이 충격적으로 현실화되는 계기였다. 그야말로 졸지에 서울 시민들은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처럼 배수의 진을 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분단상황, 정부에 대한 불신 등이 중첩되어 한강 이북에 사는 것에 대한 불안은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60년대말, 70년대초는 그야말로 안보에 대한 불안이 피부로 느껴졌던 시기였다. 56함 피격 사건, 동백림 사건, 프에블로호 납북 사건, 미군 정찰기 격추 사건, 대한항공기 납북 사건들이 속속 발생했다.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계기였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면서 이전에 비해 강남지역으로의 접근도 쉬워졌다. 그리고 1968년 1월 21일, 소위 1. 21 사태가 일어났다.
어쩌다 방송을 탄 김신조의 '박정희를 죽이러왔다'는 말 한마디는 그 동안 축적된 서울 시민들의 공포감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7) 어차피 늘어나는 인구로 새로운 지역의 개발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같은 해 영동지구 구획정리가 시작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강을 건너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한 1970년대의 상황, 당시 땅값의 변동 등을 보면 이것이 결코 싸고 좋은 환경을 찾아 이주하는 일반적 신도시 개발의 패턴에 전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8) 강남 개발 당시 터진 현대 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에서 보듯이, 강남으로 이주한 사람들 중에는 국회의원, 장관 등 우리 사회의 힘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만약 전쟁이 다시 일어나 서울이 적에 의해 점령당한다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놓일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리 피난을 가는 심정으로 강남을 향해 이주한 것이 아니었을까? 9) 당시에 유행했던,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라는 말에는 어떤 미묘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을 것이다. '강남'이라는 단어의 사용방식 자체가 또한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같은 한강 이남이면서 영등포나 관악 등지를 강남으로 지칭하지는 않는다. 결국 강남은 단순 지역 개념이 아닌, 어떤 특정한 성향이나 계층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인구 수백만의 신도시를 건설된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어폐가 있다. 그러나 그 개발의 신속함과 이주 집단의 성격 등으로 보아 강남의 개발은 뭔가 숨이 막히도록 긴박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1. 21 사태는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여러 사건의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다. 지금도 한강에 걸려있는 저 수 많은 다리들, 그리고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을 때 겪었던 충격들을 염두에 두고 보면 확실히 서울 시민들에게 다리가 끊어지는 사건은 정말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이 아닐 수 없다. 서울은 '물에 덴' 경험이 많은 도시인 것이다. 10), 11)
피난사회
모든 이의 마음속에 불안이 깔려있고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며 원칙이나 정의 보다 권력과 돈, 연줄 등이 더 중요한 사회,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데 빠지지 않고 동원되는 이런 표현들은 바로 피난사회의 중요한 특징들에 다름 아니다.
"...... 그렇기 때문에 피난 행동은 전쟁 이후 현대 한국인의 정치적 행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결국 한국전쟁기의 피난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전쟁과 더불어 만성적인 정치사회 현상으로 구조화되어 한국 사회를 '피난사회'로 만들었다. 또한 피난행동은 개인의 행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상태 사회 구성원의 구조화된 행동으로 확대되었다.
피난사회에서는 모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모두가 피난지에서 만나 사람처럼 서로를 대하며, 권력자와 민중들 모두 어떤 질서와 규칙 속에 살아가기보다는 당장의 이익 추구와 목숨 보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중에서)12)
피난사회의 이러한 특징들은 현대인의 유목민적 특징들과 결합하여 기묘한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정착이란 단어는 그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다. 사람들은 이사를 마치자 마자 더 큰 평수의 아파트를 향해 전진할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그래서 언제 버리거나 가져갈지 모르는 짐들은 모두 발코니에 쌓아 둔다. 집의 내부는 꾸미거나 가꾸지만, 정작 사회를 향한 집의 얼굴인 발코니가 밖에서 어떻게 보일지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의 건물 입면은 그야말로 피난사회의 전형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은 서민 아파트건 고급 아파트건 구별 없이 일어나며, 골목길을 향해 우리 집 하수를 흘려보내거나, 전체의 조화에 대한 일체의 고려 없이 아우성치는 간판들로 도시를 덮어 버리는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현상이다.
열린 도시를 위하여
물리적 환경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상황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것은 건축 결정론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건축 결정론은 건축을 일종의 사회적 엔지니어링으로 보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병폐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근대주의자들의 현실적 한계로 귀결된다.13)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결국 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건축도 변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무기력으로 우리를 인도할 뿐이다. 결국 우리는 건축과 사회간에 존재하는 역동적인 관계, 즉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의 상처와 기억의 집적체로서의 우리의 건축과 도시를 들여다보는 것과 동시에, 상처를 치유하고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적극적인 가능성을 또한 보아야 한다. 통일된 나라, 열린 사회의 구현이라는 우리의 사회적 과제는 건축 및 도시적 과제이기도 하다. 식민지나 전쟁이 남긴 물리적 흔적에만 집착하는 태도로서는 도저히 이들 과제를 달성할 수 없다.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다고 해서 일제 시대의 아픈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강압적이며 일방적인 의사소통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억압에 시달렸던 아픈 기억을 더 확대재생산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상처와 기억을 논하면서 그 물리적인 흔적들 못지 않게 우리 사회의 저변에 깔린 생각들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개인의 삶 속에 반영된 역사의 힘을 발견하는 것은 어쩌면 끔찍한 경험일 수 있다. 우리의 삶이 까닭 없이 피곤하고 투쟁적인 것이 '산다는 게 원래 그런 것이다'라는 차원이 아닌, 어떤 구조적인 문제에 연유하고 있다는 자각은 절망적이며 동시에 희망적이다.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반면, 우리의 본질적인 특징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물리적인 폐허는 오히려 쉽게 복구되어도 사회적, 정신적인 후유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지속된다.
전쟁 발발 50년만에 남북한 정상이 만나고 화해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는 지금,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나고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 못지 않게 이제야 우리 모두 피난 보따리를 내려놓게 될 가능성에 기대를 건다. 더 이상 서로 쫓거나 쫓기지 않는 그 상황에서 우리는 건축과 도시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보다 유익한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여 살기는 이제부터 시작인지 모른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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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1) 임지현 외, '우리 안의 파시즘', 삼인, 2000, 37-38쪽
주2) 이것은 물론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주3) 담은 사유재산과 공공재산과의 경계를 이루는 중요한 건축적 요소이다. 따라서 담의 처리는 건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하다. 전통 건물에서 담은 공간을 구획하고 이를 풍부하게 하는 매우 적극적인 건축적 장치였다. 그러나 오늘날 건축에 있어 담은 그냥 강화된 대지 경계선일 뿐으로 이렇게 된 것은 우리 건축가 도시의 큰 비극의 하나이다.
한편 사회 일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담장 없애기 운동'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 있고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철통같은 담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한 정반대의 또 다른 극단이라는 성격이 또한 없지 않다. 문제는 담이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주4) 5.16 광장은 김현옥 시장 당시 박 대통령의 지시로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 필적하는 크기로 지어졌다. (여현덕, 임용한, '서울을 읽자', 고려원, 1996, 316쪽)
주5)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한국전쟁사', 일신사, 1996, 218쪽
한편 한강다리 조기 폭파 사건의 이후 처리 방식 또한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은 결국 고위직이 아닌 말단 집행자인 최창식 대령이 졌다. '희생양의 정치'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게, 2000, 114쪽)
주6) 서울과 부산은 이런 점에서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서울의 한 복판인 용산에 미8군부대가 있듯이, 부산에는 소위 '하야리야(Hialeah)' 부대가 있다. 두 도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원래 시 외곽에 있던 군부대들이 시내로 들어왔고, 이로 인한 도시문제들이 속출되고 있다. 서울의 경우 동작대교는 미군부대를 피해 기형적으로 우회하며,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은 삼각지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구역을 거의 평행으로 달리고 있다. 서초동 정보사 주변의 도로망과 지하철 노선 또한 근본적으로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주7) 역시 김현옥 시장 재임 당시의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와대 인근 지역의 경계가 더욱 강화되었고, 같은 해 9월 청와대 배후 지역에 '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도로가 건설되었다.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물리학자 이휘소가 격살 당하는 장소로 스카이웨이가 설정된 것도 이 도로가 갖는 의미심장함을 보여준다. 지금도 스카이웨이에는 사진 촬영이 자유롭지 않고, 차량의 구조에 따라 통행이 제한된다. 대체로 우리에게 청와대 인근 지역은 존재하되 알 수 없고, 알아서도 안되는 곳으로 남아 있다. 우리 도시엔 이런 지역이 너무나도 많다.
한편 그린벨트의 설정이나 풍치지구, 고도지구, 미관지구의 지정 등은 본연의 목적 이외에도 전시 군사 작전을 용이하게 하고 수도권 내 군사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를 아울러 갖고 있었다. 도시계획에 있어서의 이러한 안보논리는 1. 21 사태를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다. (한국공간환경연구회, '서울연구', 한울 아카데미, 1995, 380-381쪽)
주8) 은평구의 경우, 서울 시내에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는 지역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의 저 과열된 부동산 시장에서도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뿌리깊은 나무, '한국의 발견: 서울', 1983, 219쪽) 은평구를 비롯, 그 이북의 일산 신도시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북한의 위협에 대해 침착함을 되찾고, 오히려 통일 이후의 가능성이 서서히 제시된 90년대에 들어서이다.
주9) 1978년의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사건에는 전 현직 장, 차관, 국회의원, 언론인 등을 포함한 총 190명이 연루되었다.
주10) 도시가 주어진 자연 환경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도시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미국 동북부의 뉴 헤이븐이란 도시는 한 때 보스턴, 뉴욕과 겨루던 항구를 갖고 있었으나 강에 의해 실려온 토사에 의해 하상이 높아져 항구가 폐쇄되었다. 그 이후 시는 엄청난 투자를 하여 대규모 운하사업을 조성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고, 지금 그 도시는 철저하게 바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주11) 그래서인지 아직도 한강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면서도 그 일부로 느껴지지 않는다. 강북강변도로와 올림픽 대로로 인해 철저하게 도시로부터 격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강변의 그 어느 건물을 보아도 강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지어진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고수부지가 널리 이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차를 타지 않고서는 거의 개구멍에 가까운 통로를 통해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주12) 김동춘, 앞의 책, 64-65쪽. 한편 단재 신채호도 조선사회를 '피난사회'로 묘사한 적이 있다.
주13) 르 코르뷔지에의 "혁명이냐, 건축이냐; 혁명은 피할 수 있다."는 발언은 건축을 통한 사회개혁이라는 근대건축의 모토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주14) 이상은 필자가 1999년 가을 학기 서울건축학교에서 개설한 설계 스튜디오인 '공포의 도시'의 근간이 되었던 내용이다. 당시 스튜디오에 참여한 김석기, 이상래, 류정민 군의 조사내용이 많은 도움을 주었음을 밝힌다. 이 스튜디오는 당시 아크포럼(www.archforum.com)에 '실황중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