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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 디자인이란?

 

웰빙적 디자인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웰빙적 디자인은 포괄적이다

종래의 디자인은 차별성을 획득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남에 대한 나, 내부에 대한 외부, 정상인에 대한 장애인, 수평에 대한 수직 등 모든 것을 대립이나 구별의 관계로서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웰빙적 디자인은 상호관계를 중시하며 대립이 아닌 조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갈등이나 모순을 기계적으로 극복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오히려 다양성을 존중하고 갈등과 모순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종전의 실내 디자인의 경우, 일단 외부에 대해서 내부의 영역성을 확보하고 규정하는 것으로 작업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디자이너의 사고도 내외부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건물 내외부간의 소통이란 문제는 실내 디자인에서는 종종 잊혀지곤 했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건물들이 이렇게 주변에 대해서 등을 돌리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입장에서 설계되고 지어지는 것이다. 실내 디자인이 내밀화하면 할수록 도시환경은 그만큼 메말라가게 마련이다. 공공의 역역은 초라하고 밀실만 발달하는 우리 도시의 기형적 모습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실내외를 함께 아우르는 보다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디자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종래에는 일단 정상인과 장애인을 구별하고 각각에게 서로 다른 디자인적 접근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웰빙적 사고는 보다 포괄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우선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상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왼손잡이이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어린이이거나, 외국인이거나, 심지어 여자인 경우 디자이너들의 도면과 상상 속에서 돌아다니는 저 ‘개념적 정상인’이 아닐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이나 ‘barrier-free design'의 정신은 이제 정상인-장애인 구도를 넘어서 모든 영역에 본격적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웰빙적 디자인은 환경친화적이다

환경친화적이란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우선적으로 환경 파괴를 줄이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역설적이지만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시각적으로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종 이것은 상당한 환경파괴를 수반하는 경우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목조주택의 경우를 예로 들면, 계획적으로 조림된 목재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림의 나무를 베어 사용한다면 보기에는 환경친화적이어도 실제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된다. 

디자인이란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환경파괴를 수반한다. 디자인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필요하고, 폐기물이 발생하며, 새로운 재료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선의 노력도 환경파괴를 없애는 것이 아닌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엔트로피’의 저자인 리프킨은 ‘종말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지연시킬 수는 있다’고 했다.

지금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리모델링은 이런 점에서 총체적 환경파괴를 줄이는 방법일 수 있다. 신축-철거-신축-철거로 연속되는 악순환을 통해 엄청난 건설 폐기물이 배출되는 상황을 부분적으로나마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있는 것을 잘 활용하는 태도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미학의 탄생을 가져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리모델링을 하면서 전체를 완전히 새로 감싸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부분과 새로 첨가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대비시키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이것은 이미 역사유적의 보존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법인데 일상적인 리모델링에서도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웰빙적 디자인은 저자극성이다

현대의 실내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특성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특히 인쇄나 영상매체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요즘, 시각적 특성은 과도하게 강조되는 측면이 있다. 새로운 것, 신선한 것을 찾는 욕구는 항상 있어왔다. 결국 디자인은 갈수록 자극적이 되며, 디자인을 이해하고 즐기는 것은 종종 자극에 견디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서히 물의 온도를 올리면 화상을 입을 때까지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것을 별로 자극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웰빙적 디자인은 이렇게 시각적 자극을 완화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천연 소재가 주는 질감과 색감이 환영받는 이유도 그것이다. 이런 기본 바탕에서 이질적인 재료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면 자극의 절대양은 줄이면서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즉 상대적인 자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극성 디자인은 실내 디자인 못지않게 공공 영역의 디자인에도 필수적이다. 우리의 도시 환경은 색, 재료, 조형, 등 모든 영역에서 가히 초자극적인 상황이라 할 만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의 적응 능력도 상당하여 겉으로는 잘 대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특별히 비교할 만한 대상이 잘 주어지지 않는 지금, 속단은 이르다고 할 것이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인간은 보다 자극이 덜한 환경에 오래 머무르고 싶어 할 것이다. 이렇게 실내 디자인에서 도시환경에 이르기까지 웰빙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저자극성 디자인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웰빙적 디자인은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탈피한다

인간중심의 사고란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환경문제에 있어서는 꼭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인간은 지금까지 만물의 영장이며 자연의 지배자라는 인식하에 환경을 대해왔다. 그러나 갈수록 환경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일 뿐이며 따라서 다른 환경 요소들과의 공존이라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환경중심주의(eco-centricism)의 사고이다. 

디자인의 분야에서 인간중심적 사고가 만들어내고 있는 잘못된 예들 중의 하나가 조경이다. 언젠가부터 자연을 박제한 듯한 조경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잎사귀와 껍질을 제거해버리고 잔가지를 쳐낸 추상화된 죽은 나무를 실내에 들여놓는다던지, 아니면 살아있는 나무를 심되, 전혀 나무가 자랄 수 없는 환경에 하나의 시각요소로 배치하는 것 등이다. 나아가 진짜와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 가짜 나무를 심는 경우 또한 그 바탕에 깔린 생각은 동일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체를 생명체로 보지 않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신진대사와 호흡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인간과 식물이 이룰 수 있는 절묘한 환경적 균형에 대한 관심 보다는 보기 좋은 인테리어 소품 정도로 취급하는 태도인 것이다. 게다가 조경에 무지한 많은 디자이너들이 잘못 심어서 죽어간 나무는 수도 없이 많다. 이것은 대체로 우리가 동물이 아닌 식물의 생명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덜 예민한 것에도 이유가 있다. (부주의나 무관심으로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다고 생각해보라!)

근대건축에 있어서 자연은 항상 기계화되고 타자화된 대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자연을 추상화, 박제화 하는 조경의 경향은 이러한 전반적 분위기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웰빙의 개념, 특히 보편적 웰빙의 개념으로 보았을 때 이제는 시각을 달리할 때가 되었다. 인간을 위한 웰빙에서 전반적 환경의 웰빙으로 사고가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도 웰빙, 자연에게도 웰빙이 필요한 것이다.        

 

웰빙적 디자인은 즐거운 몸 움직이기를 유도한다

진정한 얼리어댑터(early adaptor)의 실험 정신이 배제된 상태로 최신의 유행만을 따르는 경향은 실내 디자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요즘은 다 이렇게 하거든요’라는 디자이너의 말 앞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 고객은 드물다. 이러한 경향의 부산물로 종종 등장하는 것이 지나치게 자동화되고 첨단화된 환경이다. 차고문에서 블라인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상용품들이 자동화라는 미명하에 전기를 필요로 하며,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 암묵적 사용자가 되어 가고 있다.

웰빙적인 디자인은 어느 정도의 몸 움직이기를 전제로 한다. 더구나 그것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잘 설계되고 좋은 경관을 갖는 계단은 답답한 엘리베이터에 대한 자발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마당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정자는 일부러 마당에 나가 걷게 하는 이유가 된다. 이것이 가정이 담을 넘어 도시적인 규모로 확대되면 그 만큼 산책하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리모콘으로 상징되는 자동화의 환상에서 그만큼 벗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