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S

 

김영준 그리기

 

피겨/그라운드

 

김영준과의 대담을 진행하면서 내 머리속에는 일종의 피겨/그라운드(figure/ground)적 도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건물의 평면이나 단면에서 보여지는 내외부공간의 관계도 그러하거니와, 무엇보다 ‘김영준적 사고’ 그 자체가 이루고 있는 피겨/그라운드에 관심이 생겼다. 여기서 피겨란 자기가 스스로 관심을 갖고 있고 또 그만큼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다. 그라운드란 그 반대로 관심이나 흥미의 대상이 아니며, 사고의 영역에서 비워져 있는 부분이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완전히 바꿔서 설명할 수도 있다.)

 

김영준은 피겨와 그라운드가 명확한 건축가다. 프로그램도 중요하고, 주변 환경도 중요하고, 문화적 소양도 중요하고, 사회적 위상도 중요하고, 전통도 중요하고, 시스템도 중요하고, 테이스트도 중요하고, 결국 모든 것이 다 나의 피겨임을 주장하는 백화점적 사고의 소유자는 적어도 아니다. ‘나는 이것에 관심이 있다’ 못지않게 ‘나는 이것에는 관심이 없다’라는 것이 오히려 더 의미 있게 들리는 그런 건축가다. 채워져 있는 것 못지않게 비워져 있으며, 그 둘이 함께 어떤 선명한 구도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김영준적 사고’의 도상학이라 할 것이다. 그런 경우가 흔치 않다는 사실이 대담의 과정을 흥미롭게 했다.   

 

대담 도중 이슈가 되었던 것은 건물 너머에 존재하는 구체적 환경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그는 건물로 둘러싸인 도시의 환경이란 매우 유동적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다 대동소이하고, 그래서 사이트나 경관에 대한 분석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처리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나, 자신을 비롯한 오늘날 건축가들의 주요 전략이 되기에는 약한 이슈가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그의 관심은 보다 프로그램적이며 시스템적인 것에 가 있다. 건물의 주위환경에 따라 섬세하게 자기의 건물을 조율하는 것이 아닌, 보다 거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교적 집요하게 이 부분에 대해 묻고자 했다. 내 자신도 어느 지면을 통해 건물의 주변 환경이라는 것이 종종 ‘취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계륵 같은 것’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리고 대담자로서 무엇보다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의 농담을 읽어 내는 것이 그의 주된 관심사를 드러내는데 오히려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의 그라운드를 다룸으로서 그의 피겨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셈이다. 일종의 우회적인 방법이었던 셈인데, 그는 순순하게 자신의 생각이 갖고 있는 우선순위를 명확히 보여주었고 그에 대한 그림 그리기를 쉽게 해주었다.

 

김영준은, 이를테면, 다른 종(種)이다. 그에게는 많은 건축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전방위적 문화예술인으로서의 풍모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문학이나 철학을 인용하는 경우도 별로 없고,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어휘도 찾아보기 어려우며, 정치적, 사회적 관심의 표현도 그리 직접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다. 그는 통계나 패턴, 자본의 흐름 같은 것들을 마치 시인이 자연풍경을 읊듯이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냉정한 현실주의자의 모습이지만, 그가 지금까지 작업해 온 과정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정열적인 이상주의자의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아이디어를 먼저 만들어 놓고 투자할 사람을 설득하고 다니는 모습은 이 분야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원고를 써놓고 출판사를 찾아다니던 수많은 시인,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들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김영준에게는 전략이 있고, 그가 기본적으로 차분한 기질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는 자신의 노력이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기 시작하는 단계에 와 있는 듯하다. 어느 모로 보나 중견 건축가이면서도 지어진 건물 보다는 계획안, 과거의 실적 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딜레마에서 이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국내외에서 생겨나고 있는 듯 하다. 결과물 못지않게 그것을 만들어낸 생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건축은 물론이고 어떤 분야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대담 도중에 자기가 나름대로 외화획득을 하고 있는 건축가라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액수와 무관하게 다른 나라의 누군가가 그의 생각을 필요로 했다는 이야기이므로 그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사실인 듯 했다.

 

우리는 축구선수에게 체조도 해 보면 좋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김영준에게 왜 좀 더 섬세하고 다정다감하며 우리의 맛과 멋이 배어나는 건축을 하지 않느냐고 할 이유가 없다. 그런 것에 관심 있는 건축가들은 이미 충분히 많으며, 이제 우리 모두가 한 길을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김영준과의 대담이 있던 날 -그날은 휴일이었다- 나는 그와 헤어진 후 북촌의 한 전통다실을 찾았다. 정성스럽게 고친 한옥 방바닥에 앉아서 나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한옥의 공간 배치와 소박한 재료의 아름다움, 그리고 역사적 건물의 활용 방안 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나는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김영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와는 분명히 다른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건축이었다. 단지 그는 편안하고 익숙한 것을 마다하고 다른 이들이 가 보지 않았던 생경하고 낯선 영역을 자신의 무대로 삼으려 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산 높고 골 깊은 건축의 지형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의 하나인 것이다.